무엇이 소설의 생명력을 끌어내는가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Fog, 19년 2월, 조회 70

뼈.

 

뼈는 몸의 기본이다. 뼈가 있기에 우리의 몸은 견고하고도 분명한 구조를 유지한다. 먼저 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이 소설의 뼈대는 어떠했을까?

주인공은 헌혈센터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여성이다. 수많은 헌혈센터들이 달콤한 디저트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서로의 성과를 경쟁하는 가운데, 주인공이 근무하는 센터는 겨우 꼴찌만을 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과에 목이 탄 센터장은 ‘B센터’에서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는 유명한 사제, 헌혈왕을 우리 센터로 모셔오는 자에게 정규직 자리를 줄 것을 약속한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이지만, 설상가상으로 자살시도를 한 뒤 뱀파이어가 되어버려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헌혈왕의 피가 반드시 필요해지게 된다.

이 소설의 ‘뼈’는 제법 흥미를 끈다. 무엇보다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헌혈’에 ‘디저트’, 거기에 ‘뱀파이어’까지 등장하는데. 어우러지기 어려울법한 ‘힘이 센’ 키워드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역할이 분명하며 유려한 황금비를 이루고 있다. 매력 요소도, 서사가 근거할 배경도 잘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글이 전개되면서는 그들 간의 매끄러운 연결성이 아쉬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관절이 삐걱이는 듯했다.

‘피’와 ‘디저트’는 ‘현혈센터’라는 공간을 통해 현실을 반영한 듯 설득력 있는 연결성으로 묶였지만, 시간이 가며 서로간의 균형이 무너졌다. ‘피’가 중심이 되고 ‘디저트’는 단순한 배경처럼 놓인다. 디저트가 피를 보조하는 그림도 충분히 훌륭하고 좋은 것이 될 수 있었으나, 사건이 진행되어 가면서 분량의 분배가 발목을 잡았다.

‘피’와 ‘뱀파이어’는 본래가 필연적인 연결성으로 묶여 있으므로 굳이 길게는 적지 않겠다. 여기에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 ‘헌혈’을 더한 것은 참신함이라는 이점을 가져와 ‘뱀파이어’라는 키워드의 오랜 단점인 ‘낡음’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뱀파이어’와 ‘디저트’는 어떨까?

이들 사이의 중간부, ‘몸통’으로 놓여있는 ‘피’가 적절한 역할을 다해주기만 했다면, 이 둘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성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소설에서 ‘피’는 때로 너무 남용되었다. 그렇기에 몸통이 너무 크고, 머리와 사지는 그에 비해 작은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그림이 되었다. 피는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직접 등장하지 않으면 묘사에 등장했다. 작품만의 분위기와 분명한 색체를 끌어내기 위함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이미 충분했던 피의 위력은 오히려 약해졌다.

결국 ‘뱀파이어’와 ‘디저트’는 언뜻 보기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뱀파이어에서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를 재료로 한 디저트를 먹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주인공의 개인적 취향이었을 뿐, 작내의 적절한 연관관계의 산물은 아니었다. 차라리 뱀파이어로서의 그들이 ‘맛있는 피’에 굶주려 있었기에 인간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만찬이라도 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어땠을까. 독자의 입장에서 보완을 위한 상상이 먼저 이어졌다는 것은, 결국 아쉬웠다는 것이다.

 

근육.

 

근육은 몸의 발현(發現)이다. 근육이 있기에 우리의 몸은 움직이고 작동한다. 피가 끓어오르는 생명의 애너지라면, 근육은 그것을 반영하는 생명의 ‘힘(력)’이다.  그럼 근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소설의 근육은 어떠했을까?

주인공이 근무하는 헌혈센터에는 동료인 태식이 있다. 그는 성실하고 친절하다. 한편 센터장은 사람을 부려먹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노력도 하지 않고 성과를 내길 바란다. 주인공은 그 때문에 디저트의 맛이 변했을 때, 태식을 의심하지 않고 센터장을 의심한다. 헌혈왕을 꼬셔오라는 황당한 요구를 받고 진상 때문에 기분까지 상했을 때에, 주인공은 만족스러운 연인관계였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선고당한다. 그는 예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하느님께 맹세코 절대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결국 주인공은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스스로 몸을 던진다. 그런 그를 구한 것은 뱀파이어였다.(중략)

본론부터 말하면, 이 소설을 움직이고 있는 근육은 많은 부분에서 ‘손상’되어 있었다. 부족한 시간 내에 전체의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해 알면서도 감안했던 부분이 컸겠지만, 소설이 갖는 힘은 이 때문에 당연히 빈약해지는 수밖에 없다.

작품 전체의 서사는 원인과 결과가 명료했다. 태식은 성실하고 친절하며 긍정적인 인물이었기에 잘 의심이 가지 않는다. 센터장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모르고 돈을 아끼려 하는 부정적인 인물이었기에 먼저 의심이 된다. 반복되는 많은 사건들 속에서 애인에게마저 차이며 주인공은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때로 그 연결성은 너무 과격하거나,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자살을 결심하는 장면. 과연 그녀는 그렇게 단번에 무너질 정도로 코너에 몰려 있었는가? 직장이야 그만 두면 되는 것이었고, 진상 손님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것은 태식 덕분에 어느 날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녀가 마음을 주었던 남자친구가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한 것은 확실히 거대한 사건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음을 결심하는 건 공감보다도 당혹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독자는 이런 질문을 소리내 이야기할 수 있다. ‘혹시, 주인공을 뱀파이어로 만들기 위해 옥상에서 자살시도를 하도록 “명령”한 게 아닌가요?’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의 방점이 작내의 개연성이 아닌 작외의 필요성에 찍혀있다는 것이다.

후자를 잘 감추고, 전자에 계속 이입시키는 것이야말로 소설에서 근육이 해야 하는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뒤로 이어지는 장면, 인공호흡과 CPR 때에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켰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환자는 어디가 부러졌을지 모르기 때문에 결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며 즉시 구급차를 불러야만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 A는 그런 그녀의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의 힘으로 심폐소생술을 한다.

물론 그가 상식이 부족했다고는 하나 이후 한 번은 언급되어야 했으며, 심지어는 결말부에 이르러 쇠파이프에 머리를 얻어맞은 A에게도 주인공이 심폐소생술을 하는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심폐소생술은 결코 외상이나 뇌출혈을 낫게 해주는 처방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를 미리 습득했는가 아닌가를 떠나서, 행동이 일어난 작내의 가장 큰 원인이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입맞춤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퇴고의 과정에서 작가가 가장 힘을 쏟아야만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근육이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근육이 원활히 작동하지 못하면 결국 소설은 재미있어지지 못한다.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작동했다면 이랬을 텐데….’ 라는 아쉬움은 작가에 대한 기대는 키워도 작품의 재미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은 간호학과 출신이다!)

 

살.

 

살은 몸의 매듭이다. 결국 살이 없다면 근육과 뼈뿐인 우리의 몸은 그로테스크해지며, 온갖 외부의 공격들로부터 취약해진다. 살은 우리의 방패이자 아름다운 포장지다. 그럼 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소설의 살은 어떠했을까?

소설은 처음에 질문으로 시작한다. 헌혈에 대한 질문이다. 이후 일반적인 상식에는 들어가지 않는 흥미로운 정보들을 풀어놓으며 소설의 배경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소설의 문장은 시종일관 유쾌하거나, 술술 읽히거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높은 전달력을 갖는다. 각 캐릭터는 등장과 퇴장이 분명하고 자신의 역할에 따라 적합한 말투와 행동을 구사한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의 살은 유려한 완성도를 가졌다. (문장을 공부한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이 뼈와 근육이 가진 문제점들을 보완해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나가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쉬운 점도 없진 않았다. 바로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캐릭터들이 그랬다.

분명하고 평면적인 캐릭터는 결코 나쁜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입체적인 캐릭터는 많을수록 소설에 해가 되곤 한다. 그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동안 다른 더 중요한 것을 놓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다만 평면적인 캐릭터는 잠깐 나오더라도 ‘있을법해야’ 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악역이 되는 순간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자’가 된다. 특히 처음에는 긍정적인 인물인 듯 대두되었다가 나중엔 악역의 면모를 드러낸 태식이 그렇다. 그는 본심을 숨기고 연기를 이어가다 후반에 본모습을 드러냈다기보다도, 후반에 갑작스레 작가의 명령을 듣고 와 연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껏 주인공을 속여왔을 만큼 지능적이면서도 자신의 추악한 본심을 모두 나불대거나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물론 ‘클리셰’의 보호를 받을 수는 있으나 지나치게 쉬운 방식이다.

그렇기에 캐릭터를 이분법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은 늘 위험하다. 비판을 받기도 쉬우며, 이를테면 늘 미녀와 추녀, 성녀와 마녀 밖에는 그려내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듯이 쉬이 혐오를 뿌리는 무기로 전락하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공포를 느끼기 쉬운 순간은 의외로 늘 나와 같은 상식을 공유하던 평범한 사람이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괴물이나 할 이야기를 입 밖에 내놓을 때다. 괴물은 평범함 속에 숨어 전염되곤 하지 않을까. 독자 개인으로서는 태식이 그런 우리 주변의 어둠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이상으로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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