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소설가 혹은 소설이란 말이 들어가 있으면 무조건 클릭해보는 거죠. ‘소설’이란 단어 자체에 매혹돼 있습니다. 소설가 이야기는 흥미롭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글 쓸 때 혹은 안 쓸 때 어떻게 하나 같은 소소한 팁 같은 걸 훔쳐볼 수도 있고요. 글쓰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을 공감해볼 수도 있고 기타 등등. 책장에는 아직 읽지도 못한 ‘소설’, ‘소설가’란 단어가 제목으로 들어간 책들도 몇 권 있습니다. 무작정 사놓고 보는 겁니다. 소설이나 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무조건 좋습니다. 이 소설을 만난 건 제목에 소설가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어요. 뭔데 이렇게 소설가를 세 번이나 강조했을까? 결국 저는 브릿G를 매일같이 드나들고 있으니 숙명처럼 이 소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소설가가 된다는 건 끝내주게 즐거운 일이다.’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라니 더욱 더 흥미가 당기지 않나요?
이미 성공할 대로 성공해서 돈 걱정 같은 건 할 필요도 없는 소설가의 이야기네요. 큰 집에 살고 책도 원없이 채워놓고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남편과 해장국을 기가 막히게 끓여주는 1인 출판사 사장이었던 친구도 있는 행복한 소설가였는데 오랜 소설쓰기로 열정을 소진시켜버리고 시작부터 절필을 선언하는 ‘소설 엔진’이 수명을 다한 소설가가 주인공이에요.
소설가 얘기를 보러 왔는데 벌써 절필을 선언하면 어떡해? 살짝 당황했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어떻게 끝날지 감을 못 잡은 채 이야기를 읽어나갔어요. 얄밉게도 이 소설가는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뭐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같은 고민을 합니다. 나 돈 많다니까 같은 뉘앙스를 풀풀 풍기며 와인을 홀짝이는 작가. 그러고 있는 앞부분을 읽다 보면 가난한 작가들이나 작가 타이틀도 못 달아본 작가지망생들은 열불이 나서 소설을 읽다 말지도 모를 위험이 있습니다. 혹,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셔야 해요. 원래 처음부터 너무 잘 나가거나 돈자랑, 잘난척, 똥폼을 잔뜩 잡는 사람들이 끝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잖아요.
비록 등단 20년만에 절필을 선언하고 은퇴하려는 소설가의 이야기지만 누구나 한번쯤 꿈꿔볼 해외여행을 잠시 잠깐도 아니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꿈같은 일들을 대리 체험해볼 수 있다면 … 전 그 마음 때문에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절필을 선언했지만 진짜 절필을 할 리가 없지, 같은 생각도 하고 있긴 했지만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술자리에서 나오게 된 ‘두미르의, 두미르에 의한, 두미르를 위한 공모전’을 열자는 제안이 결국 작품 전체의 큰 줄거리가 됩니다. 두미르는 이 소설가 이름입니다. 쓰는 건 그만뒀지만 읽기까지 그만둔 건 아닌 모양이고 후배 양성을 위해서라는 좋은 구실도 있으니 솔깃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 남편과 떠난 해외여행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돌아와서는 공모전을 하게 됩니다.
예술가들은 순수한 창작물이라고 우기지만 타인의 작품을 읽고 모방하면서 배우고 타인의 작품에 자극 받아서 새로운 창작물을 생성해내는 일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절필을 선언했던 이 노련한 소설가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뭘까요? 소설 속에 다 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목도 작가도 잊어버렸어요. (아마도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혹시 이 소설에 대해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한 여자 작가에게 작가지망생이 편지를 보내죠. 펜레터 같은 것이었어요. 당신이 매일 앉는 소파 속에 들어가 있곤 한다고 고백을 하는 내용이에요. 그 소파는 작가가 폭 안긴 것 같은 느낌에 몹시 편안해하고 좋아해서 자주 앉는 그런 소파였는데 작가는 그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그 소파를 무서워하게 됩니다. 작가지망생에게 깜빡 속아 넘어간 거예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두미르는 공모전을 통해서 서서히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죠. 어쩌면 실제로 죽어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궁금해하고 예상했던 것들이 맞는지 어떤지 소설 속에선 명확하게 결말을 내주고 있진 않지만 전 그렇게 끝나버린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미 다 했으니까요. 저 소파 안에 한 남자가 들어가 앉아 있나 확인해보려고 소파를 뜯어보는 것까지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요.
‘여자는 자신을 잡아먹은 아버지의 배를 가르고 다시 태어났다. 두껍고 질긴 뱃가죽을 찢자마자 여자는 자신의 동생들을 먼저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들은 아버지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온 여자의 혈육이었다. 형제자매를 모두 구한 뒤 여자도 마침내 아버지의 몸속을 빠져나왔다. 핏물을 뒤집어쓴 여자를 보고 핏덩이 같은 동생들이 경의를 담아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의 시작을 부수고 스스로 처음이 되신 우리의 어머니, 크로노스여…”
소설 속에선 그리스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멋대로 비틀었다고 표현하며 <크로노스의 배를 가르고>에 관해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늘과 땅에서 나온 티탄들 중 하나입니다. 하늘의 남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자식들(티탄) 중에서 막내(남신)입니다만 포악한 아버지에 반기를 들고 어머니 편이 되어 아버지 우라노스를 해치우고 신들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도자이자 농경을 다스리는 신입니다. 제우스의 아버지기이기도 하죠.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무시무시합니다. 자식을 그냥 다 먹어버려요. 우라노스도 그랬고 크로노스 자신도 그랬습니다. 먹고 먹히는 이 관계를 소설 속에 교묘히 옮겨다 놓았습니다. 공모된 소설을 읽는 작가와 소설을 쓴 신예작가의 관계란 그런 것일까요? 소설과 작가의 관계가 그렇다는 걸까요?
‘소설속 크로노스는 바로 나였다. 소설의 뱃속에서 자라고 그 뱃가죽을 찢고 나와 소설가가 되고, 다시 꾸역꾸역 뱃속으로 소설을 집어삼키는 괴물. <크로노스의 배를 가르고>의 끈질긴 외침은 그거 하나였다. 내가 괴물이라는 것. 스릴러의 신? 웃기지마. 넌 소설을 먹고 소설을 토하는 괴물일 뿐이야. 실체 없는 삶을 사는 보잘 것 없는 인간. 언젠가는 네가 잡아먹은 젊은 피의 소설들이 너의 배를 가르고 나와 너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소설가는 <크로노스의 배를 가르고>를 읽으며 문단의 신예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조롱당하며 모멸감을 느끼는 기분을 맛봅니다. 젊은 소설가가 대놓고 소설가에게 ‘잔인’하게 대하고 ‘전혀 조심하는 기색’조차 없이 ‘싸늘한 눈빛’과 ‘삐뚤어진 미소’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젊은 작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해요.
‘이 세상에 소설가가 자기 밖에 없는 양 떠들어댔다. 사람들은 젊은 소설가가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당연했다. 모두 내 배를 누가 찢어발겼는지 똑똑히 보았으니까. 젊은 소설가는 내 시체를 밟고 일어설 터였다. 마치 얼마나 우뚝 설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빳빳이 고개를 쳐든 그를 보다가 나는 주름 하나 없는 그의 매끄러운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신예 작가가 쓴 소설을 통해 살인당하는 동시에 살인을 하고픈 기묘한 체험을 하는 소설가의 심리가 섬뜩한데다 악의를 가진 묘령의 신예 소설가에게 유린당하는 노련한 소설가의 처지가 크로노스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자식에게 자신의 자리를 위협당할 수 밖에 없는 왕의 불안감 같은 것, 1인자의 조바심 같은 것.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가. 잔인하고 황홀하고 섬뜩하고 아름다운 이런 소설을,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가. 여전히 손가락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끝에서부터 찌릿찌릿 전율이 흘렀다. 내가 썼어야 했다. 내가 써야만 하는 소설이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가 쓴 건지도 몰라.”
누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순간을 맞딱뜨리게 됩니다. 훔치고 싶은 문장을 만나거나 제 속의 뭔가를 건드리는 완벽한 소설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무 깊이 절망하면 오히려 아무 소설도 못 쓸 것이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갑작스런 열정으로 새로운 소설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에겐 바로 그런 존재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소설가가 된다는 건 끝내주게 즐거운 일이라고.
설마 아직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소설가 말고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한 배에서 나왔다.
크로노스.
나의 크로노스여.’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당신은 아마 두미르 공모전에 공모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당장 소설을 쓰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죠. 리뷰라는 형식을 빌어 저 문장들을 옮겨 써보고 싶었던 것처럼요. 어쩌면 반드시 성공해서 두미르처럼 자기 이름을 딴 공모전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리뷰엔 드러내지 않았지만 작품이 숨기고 있는 반전과 미스터리는 독자분들 스스로 알아내 주시길 바랄게요.
*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면 본의 아니게 소설 속에서 편집장님을 죽인 소설가 얘기를 쓴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척 찔렸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공포에 질릴 수도 있구나….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