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자연히 분노로 이어지는가. 공모 공모채택

대상작품: 산타 시스템 (작가: 녹차빙수, 작품정보)
리뷰어: 다상냥, 19년 1월, 조회 43

*들어가기 전: 꺼리낌 없이 부탁한다고 하셔서 꺼리낌 없이 써봅니다. 참고로 제 주관적인 의견이니 너무 깊게 받아드리지 마세요.

 

잭 런던의 작품 “야성의 절규”에는 납치당해 썰매개로 팔려나간 개 ‘벅’이 등장한다. 벅은 고고한 귀족가의 개였으나, 썰매개로 팔려갔을 때, 썰매를 끄는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자신의 주머니에 뭐 하나 들어오는 것 없음에도 벅은 선두에 서기 위해 다른 개들과 경쟁하고, 주인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얼마까지 끌 수 있는 지 내기의 대상이 된다. 벅이 그 사슬에서 풀려난 건, 노동의 고통이 두려워 도망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주인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반면, 이 소설의 주인공(엘프)은 순수하게 ‘노동의 고통’ 때문에 산타를 죽이게 된다. 그럼 그는 무엇을 계기로 노동의 고통을 느꼈는가. 그저 노동이 힘들고, 그 힘든 노동으로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면, 노동의 고통을 인식하고 도망가게 되는가. 이 소설의 아쉬운 점은 “그가 어떻게 노동을 고통으로 인식했는가”라는 연결고리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결말에서도 큰 충격을 주지 않는다. 왜 복수해야 하는가. 노동이 고통이라서? 고통 받으면 다 분노하는가. 그럼, 하루종일 일해도 하루 먹을 벌이를 벌지 못하는 제3세계 아이들은 왜 분노하지 않는가.

참고로 전태일 열사도 노동을 고통으로 인식하였고,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공들을 보고 불쌍하여 자신의 월급을 털어 먹을 것을 쥐어줄 정도로 따뜻한 성품을 가졌으나, 그가 투쟁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때가 아니라, ‘노동법’을 알고 나서였다.

분노는 고통보다, 배신, ‘이건 잘못 되었다.’라는 자각으로 이루어진다.

단편이라 그 부분까지 서술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 연결고리가 사라진 소설은 묵직하게 날릴 한방이 부족해 보여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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