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끝까지 글을 읽게 만드는 것만 해도 대단한 능력이죠. 그런데 해도연님의 글은 읽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감상까지 남기고 싶어 못 견디게 만듭니다. 대체 어디서 오는 매력일까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걸려 버렸네요.
아마 저는 로슈 한계에서 걸린 듯해요. 위성이 행성의 인력에 의해 조각조각 뜯겨 나가고 그 조각들이 떨어져 내려 행성을 불바다로 만드는 광경. 그리고 파괴되어 버린 달이 토성의 고리처럼 지구를 돌고 있는 모습. 물론 로슈 한계가 아니라 다른 원인에 의해 달이 파괴되었다고 나오지만 일단 그런 걸 상상하고 나면 이 글을 끝까지 읽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요.
지구가 파괴된 원인을 조사하던 탐사원들에 의해 이야기는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니다. 핀이라고 이름 붙여진 행성신경망. 개별 인간의 의식 혹은 인공 지능들이 하나의 뉴런 역할을 하며 마치 지구 전체가 하나의 의식을 갖춘 개별체처럼 행동한다는 개념이죠.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개미와 같이 개체들이 모여 이룬 군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사례는 드물지 않으니까요. 그런 군체의 의도나 행동은 개체들의 이익과 배치되기도 합니다. 전체를 위해 개체를 희생하는 건 다반사고 심지어는 다수의 개체를 희생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대체 이런 일은 왜 일어날까요.
그런 일이 인간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많은 인간들이 모여 움직이는 집단이 때로는 개개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게 가능할까요. 이미 지구 자체를 파괴해 버릴 만큼 많은 핵무기를 만들어 놓고 발사 직전까지 갔던 인간들이 그럴 리는 없다고 시치미 떼긴 힘들겠네요.
그래도 그런 행성신경망이 우울증에 걸려서 스스로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한다는 데 까지 가면 조금 멈칫하게는 되는데요. 이 지점에서 작가는 호르몬과 관련된 전문 용어를 쏟아 부으면서 독자의 의심을 덮어 버립니다. 어쩌면 그게 SF의 매력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걸 능숙하게 해 내는 게 해도연 님의 뛰어난 능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촘촘해지는 연결망과 넘쳐나는 지식, 가상현실을 통해 너무나 쉽게 만족되는 인간의 욕구들이 오히려 반지성주의를 불러오고 개별 인간들을 작은 커뮤니티에 가두어 버리게 되는 건 이미 우리가 겪기 시작하고 있는 너무나 현실적인 상상이기도 하고요.
여기까지 납득했을 때 세 번째 주제로 나아갑니다. 그와 같은 의식을 발현하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다세포 생물에 불과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자아가 만들어 지고 자신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독립된 개체라고 믿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죠. 소설에서 그 과정은 핀과 가넷에서 반복됩니다.
엄청난 질문을 폭탄처럼 연달아 쏟아내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 역시 작가의 능력입니다. 다만 조금 과도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게다가 핀과 가넷의 방향이 반대였다는 것도 조금 걸렸어요. 한 쪽에서는 개체들이 맹목적으로 전체에 복종하고 한 쪽에서는 개체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니까요. 그 다툼에 대한 묘사가 첨단 무기 다 버리고 꼭 주먹다짐을 벌이는 액션 영화와 닮아 있는 것도 제 취향하고는 거리가 있었고요.
이야기가 완전한 파국이 아닌 희망을 열어두고 있는 건 애초부터 의도되었던 듯해요. 정말 확실히 끝내버리고 싶었다면 굳이 달을 두 번 폭파시켜서 파편만 떨어지게 할 필요는 없겠죠. 그냥 지구에 가속기를 건설하는 게 훨씬 간단하겠네요. 핀이 원했던 건 종말이 아니라 재부팅이었나 봅니다. 베르티아의 도움 역시 핀의 계산에 있었던 걸까요.
꼼꼼하게 짜여져 있는 해도연님의 글을 읽고 나면 꼭 세부 사항들을 검색해 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여러 개 언어로 쓰인 꽃의 이름이라는 걸 알았네요. 포모나는 정원을 가꾸는 님프고요. 베르툼누스가 내리는 계절의 축복 아래 작은 꽃들은 덧없는 순환을 계속해 가겠죠. 또한 그들은 호기심 충만한 탐사원이기도 할 겁니다. 우주의 중심에서 곧장 답을 얻기 보다는 탐사 그 자체를 즐기며 드넓은 우주를 여행하겠죠. 어쩌면 우주의 구석에서 작은 꽃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줄 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