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x앙, 백x수, 삼x수, 평x수, 그 외에도 투명 플라스틱 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
우리가 흔하게 사 마시는 생수다. 예전엔 물을 사서 마신다는 개념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으나, 요즘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만큼 깨끗한 식수가 부족해지면서 희귀 자원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젠 물도 사서 마시는 시대가 되었으니, 시간이 더 지난 미래에는 공기조차 사서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사실 현재도 산소캔이 팔리고 있긴 있다. 고산지역으로 여행갔을 때 산소가 부족하지 않게 들이마시며 산행을 했던 기억이 있다.
<생의 완성을 위하여>에서는 한층 더 진일보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공장에서 유출된 오염물질로 인해 공기는 급격하게 유독화되었고, 사람들은 더이상 공기를 무료로 마실 수 없다. 호흡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산소통을 구입해야만 한다. 사람이 살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맑은 공기, 더 정확하게는 거기에 포함된 산소를 돈 주고 사야만 하는 것이다.
호흡에 비용을 내며 평생을 연장해온 생에 명확한 종료기간이 생겼다.
별다른 미사여구도 없는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섭던지. 흔히들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나간다고들 한다. 식비나 공과금 등 생활하는데 들어가는 기본적인 고정비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진짜 문자 그대로 숨을 쉬기 위해서도 돈을 내야만 한다. 나의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더이상은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인 것이다.
규칙적으로 평생 연금이 나오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경제적 능력이 줄어든다. 늙은 만큼 활동력, 생산력도 예전같지 않다. 점점 사회에서 피부양 인구로 편입되면서 나의 효용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거친 말로 쓸모가 없어진다고 해도 되겠다. 산소를 마신다는 생명 유지 활동을 위해서조차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에선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적당한 시점이 오면 스스로 삶의 종지부를 찍으려 들지는 않을까. 설령 본인은 더 생을 이어나가고 싶어하더라도, 주변에서 이만 산소 호흡을 중단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낼지도 모른다. 늙어서까지 자원이나 축내며 살아있을 바엔 일찍 죽어 그걸 아낄 수 있도록. 무척 무서운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안락사 합법화를 쉽게 할 수 없는 이유가 겹쳐 떠오른다. 안락사를 합법화한다면 ‘빨리 죽어서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생길 수 있어 함부로 도입할 수 없다던가.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신영은 천만다행으로 옆에 다연이 있다. 꾸준히 자기를 찾아와 교류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영은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비혼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연령대를 가리지 않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도 그네들만의 커뮤니티를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예전에 가족이 하던 모든 역할을 비혼 커뮤니티, 1인 가구 커뮤니티 등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는 가구 구성 형태나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굳이 가족이라는 형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유연한 발상이다. 그대로만 기능하면 1인 가구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신영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런 커뮤니티를 찾아보지만 실패로 끝난다. 애초에 꾸준히 그런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작중 존재하는 커뮤니티가 신영이 필요로 하는 것과는 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는 것만큼 죽음도 어렵네요.”
웰 다잉을 위한 신영의 모든 고민이 이 짧은 문장 하나에 축약되어 있다고 본다. 아프게 죽고 싶지 않고 죽은 후 제 시신이 훼손되는 걸 원치도 않는다. 그런데 그걸 이루려면 가족이 있어야 한다. 1인 가구인 신영으로선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홀로인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자신의 애제자인 다연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한다.
“선생님, 그런 이유라면 저와 혼인신고 해요.”
재난이 일어났던 그날, 신영이 자신을 구해준 이후로부터 마음을 키워온 다연이 드디어 용기를 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기 위해.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과 결혼하는 다연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 발목 잡는 것까진 바라지 않으니 마지막을 지켜볼 권리를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를 존중하고, 그 마지막 길을 자신의 손으로 배웅하려는 다연의 모습은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나같았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죽지 말라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르는데. 다연의 제안을 받아들인 신영은 드디어 자신의 ‘웰 다잉’을 위해 한걸음 내딛는다. 그렇지만 나는 결말을 보며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석 달이 되고, 석 달이 1년이 되는 거지. 결말까지 읽었을 때, <생의 완성을 위하여>라는 제목이 작품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다연과의 결합이 신영에게 있어 진정한 생의 완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읽으면서 안락사와 웰 다잉, 1인 가구 등 다양한 사회 주제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삶의 형태가 다양해진 만큼 이제 우리는 거기에 맞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고 적용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