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에 들어와서 꽤 많은 글들을 보았는데 읽었던 단편 중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이 아닐까 싶다. 스크롤이 끝까지 내려가고 저절로 공유 버튼에 손이 가더니 글을 좋아하는 몇몇 이들에게 링크를 보내는 나를 발견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은 이 글에서 찾기가 힘들다. 한 문장당 평을 하나하나 써가며 세심히 읽어내린다면 모를까, 일반적인 속도로 정독을 했을때는 글에 사용된 모든 아이템들이 훌륭하게 자신들의 할 일을 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을 수 없다. 문체는 더없이 담백하다. 늘어지지 않고 보여줄 것만 보여주는 문체, 김훈 작가를 생각나게 한다. 한자어가 많이 들어간 문장을 구사하는 김훈 작가와는 그 분위기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두 작가의 문체는 공통점이 있다. 독자에게 보여주고 묘사할 최소한의 부분으로 담백하게 그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배경도 적절했다. 세상, 파괴, 폭탄, 사회, 비리, 묵인, 그 외에 많은, 그 이름만 들어도 무개감이 느껴지는 소재들이 단지 학교와 학생의 이야기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상징들에 의해 표현되며 무개감은 잃지 않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글이 되어 독자들에게 녹아들었다. 간혹 너무 무개를 잡은 나머지 독자가 다음장을 넘기기가 두려워 지는 만드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 또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꼭 한번 봤으면 하는 글이었다. 작가가 표현 하고자 하고 비판 하고자 하는 것이 장담컨데 절대 다수의 독자에게 바르게, 왜곡없이 인식되는 글이다.
이 글은 재미가 있다.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도입부는 흥미를 돋군다. 작중 내내 이어지는 미스터리는 독자로 하여금 그것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추리가 계속되고 미스터리가 풀릴 때, 마침내 졸업식 날 세상을 없애노라 선언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재밌는 글이다.
재밌고, 깔끔하고, 뚜렸하다.
이렇게 칭찬을 하며 글을 본것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라는 책이 있다. 필자의 지인과 어느날은 저녁식사 자리를 함께했는데, 우연히 책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우연은 아니었다. 나는 글쟁이었고(비록 해외 활동이지만), 지인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고 30여년 동안 사업을 하며 사회에서 제대로 굴렀던 인물이었다. 그런 조합에서 책은(특히 고전은) 공통의 관심사 일 수 밖에 없다. 지인은 그 자리에서 거의 반시간 동안이나 데미안에 대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에 대헤, 정신에 대헤, 불완전 함에 대헤, 그리고 사회와 사랑에 대헤서, 끝도 없는 의견들이 책 한권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책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일년에 백권도 넘게 보시면서 유독 데미안 이야기에서 신이 나시네요.”
“그 책에 대한 생각밖에 없으니까.”
“다른 고전들도 많을 탠데요.”
그리고 그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해어지기 전까지 왜 그런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래야 나도 내 글에 적용 할 수 있다며.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식당에서 나왔을 때, 반쯤 취한 그가 소리쳤다.
“일단 애들이 있잖아!”
대리기사를 부르던 지인이 말했다.
“재밌잖아. 사람은 오지랖이 넘쳐서 말이야, 다른 사람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쓰거든. 그래서 남들이 연관된 사건을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다가 스스로 그 사건들을 해석하지. 이를태면 먹고, 소화하고, 흡수 하는거야. 놓치는 애들이 너무 많아. 책도 내는 프로라는 것들이. 내가 글재주만 좀 있었어도…..”
내 지인이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그들에 대한 오지랖을 부리고, 그 주제에 대해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 생각을 거듭하고, 결국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
말 그대로 책을 먹고, 소화하고, 흡수하는 것. 또는 책을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독자의 시선에서, 이 일련의 과정은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더없이 입채적이고 자신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인공, 에밀 싱클래어 뿐만 아니라 그와 대화하고 그에게 영향을 주는 모두가 살아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데미안은 독보적이다.
에밀 싱클레어는 방황하는 이의 초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방황을 하기에 그에게 쉽개 몰입한다. 데미안은 그런 그의, 그에게 몰입한 모두의 친구로 책 안에서 다가온다. 그는 더없이 아름다운 인간의 초상을 보여준다. 그의 날카로운 통찰과 해석은 세상에 이단적인 도발을 가한다. 그는 성찰하는 타락한 인물임과 동시에 우리를 작품의 근원에 도달하게 만드는 인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에밀 싱클레어, 혹은 우리, 에게 끝없이 속삭인다. 그는 책에서 등장한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가한다. 그 영향은 책을 덮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긴 글의 여정이 끝나고도 그 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우리를 옭아맨다. 그 깊고 두렵기까지 한 인간에 대한 통찰과 정신에 대한 해석을 우리는 긴 시간을 통해, 매력적이고 입채적인, 살아있는 캐릭터에 대한 오지랖으로 그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받아드리려 노력하게 된다. 끝없이 주제에 대해 곱씹어보게 만드는 거다. 끝없는 캐릭터의 매력이, 그의 생각과 사상이 다가온 것이다.
탤러는 또 다른 데미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탤러는 내게 살아있는 사람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훌륭한 글솜씨와 전개에 박수는 칠 수 있지만, 또 나는 이 글을 내 마음 속에서 이해했지만, 그렇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염세적인 시선을 느꼈고 작가가 바라는 바도 느꼈지만, 인공적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탤러는 텅 비어있었다.
소설 ‘데미안’ 에서의 유명한 구절을 보자.
파괴는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는 파괴하지 않는다. 단지 둘은 홀로 설 수 없을 뿐이다. 탤러는 그에게 맡겨진 막중한 임무를 해내지 못했다. 그는 파괴자인 동시에 창조자여야 했다. 그는 우리 안에서 그 자신을 창조하고, 동시에 세상을 파괴하고, 이어져야만 할 새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설득 시켜야만 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협없이 실행 하는 것. 그것이 탤러다. 하지만 창조도, 대안도, 이상도 없다. 그렇다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목적 없는 파괴인가? 새가 알을 깨고 나와 보게 될 세상에는 아프락사스가 없다니.
창조 없는 파괴는 상실이고, 대안 없는 반대는 퇴행이며, 이상理想 없는 꿈은 공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