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애국산모의 고백 공모

대상작품: 웰시코기 (작가: 김태연, 작품정보)
리뷰어: 글포도, 18년 9월, 조회 149

* 매우 주관적이며 전체 내용을 스포일러합니다. 먼저 작품을 읽고 리뷰를 읽어주세요.

 

저는 일단 이 작품을 읽고 매우 매우 불쾌했습니다.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사회, 인간 유형을 만나게 됐으니까요. 더구나 언젠가는 그럴 수 있다, 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불쾌했을 겁니다.

 

우선 그 전에 이 작가님의 작품을 무척 재치 있고 재미나게 읽었던 기대감에 작품이 눈에 띄어 열어보았는데요. 그 기대감에 반하는 소설이라 일단 실망했는데 내용마저 불쾌감을 주어서 화가 날뻔 했습니다. 물론 작가님 탓이 아니죠. 작가들은 어떤 작품이건 쓸 자유가 있고 어떤 주인공도 데려다 놓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 내용에 맞게 표현 방식이나 어조도 바꿀 수 있고 그러니 매번 비슷한 것만 만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 기대감은 순전히 독자인 제 것이니 그것에 대한 실망은 제 탓입니다.

 

주인공이 제 맘에 들지 않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뭐라 하기도 뭣해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요. 앞뒤가 맞고 개연성만 확실하다면 더욱 뭐라 할 수 없죠. (1인칭 시점이잖아요.) 물론 이 글은 짧기 때문에 그 여자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냥 고백한 내용에서 유추할 뿐이죠.

이 작품은 제가 본 작가님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문장이 훨씬 정돈 돼 있고 잘 쓰여진 대신 재치가 빠져 있어요. 어두운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게 맞다고 봅니다.

다만 전 이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을 이야기 하는 리뷰를 써야 하나 망설였습니다.

사실 지금도 낙태는 행해지고 있고 ‘아기를 지운다’는 표현을 가지고도 싸우고 ‘아직 세포일 뿐이다. 여성의 삶이 중요하다’ 와 ‘엄연한 생명이다. 낙태는 죄다.’하는 쪽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얼마 전 의사들이 ‘낙태를 안 하겠다.’하고 나서자 밑에 달렸던 댓글들을 읽으며 누군가 한탄하는 글을 보면서 저도 씁쓸했었습니다. ‘낙태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니…’

댓글만큼은 낙태에 찬성하자는 쪽이 훨씬 많아보였고 설득력이 있다고 저도 생각했어요. 미혼모들의 삶 열악하죠. 책임지기 싫어하는 남자들 분명히 있죠. 키우고 싶어도 상황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어서 아이를 입양보내는 미혼모들도 있어요. 범죄 피해자들은 또 어떻고요. 하지만 저는 미혼모가 어느 화장실 쓰레기통에 아기를 쓰레기처럼 버리고 갔다는 기사를 보는 것보단 그래도 등짝을 마구 패고 같이 굶으면서도 품어 안고 홀로 애 키우며 열심히 사는 미혼모들이 더 많더라 하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출산률 저조만 탓하지 말고 저런 모성에 돈을 팍팍 대주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고요. 그런 거 저런 거 생각하면 낙태를 무조건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고요. 또 베이비박스에 울면서 망설이면서 애기를 두고 간 엄마들의 아픔 같은 것에 관심이 있고요. 이런 거 저런 거 너무 복잡하고 저도 출산이나 육아 경험이 없다 보니 이쪽 부분은 잘 건드리질 못하는 편이기도 하죠. 그냥 겉에서 안타까워하고 그러는 게 다예요.

 

이 소설은 어떤 여자의 고백입니다. 출산한지 3주가 된 여자가 하는 생각이죠. 근데 이 여자는 착상된 태아를 ‘기생충’이라고 표현하고 ‘이름도 모르는 남자새끼의 분비물과 내 안의 무언가가 버무려져 태어난 물체’라고도 합니다. 또 태어난 아기를 ‘수거’한다고 표현합니다. -국가 정책 발표를 아기를 수거한다고 하는 표현이 있지만- 그래요. 소설 주인공의 생각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 ‘애국산모’는 ‘남자새끼와 직접 닿는 것조차 싫은데 언제나 담배냄새 아니면 걸레냄새가 나는 버러지들. 생각에서도 말에서도 썩은내가 나는 버러지들.’, ‘행위의 쾌락이 그 버러지들의 삶의 목적이지 않은가.’라고도 생각합니다. 네 이 소설 주인공의 생각입니다.

 

어느 미래엔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사회에서는 이런 여자도 살고 있겠고 그런 여자가 5천만원 때문에 임신으로 돈을 벌겠다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게 정부 정책이라니까요.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서 그런 정책을 쓰는 거고 여자는 거기에 호응한 거니까 죄를 짓는 것도 아니죠. 이건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이야, 저런 생각은 할 수 있는 거야, 라고 해버리면 그만일까요?

 

저 주인공은 마지막에 웰시코기를 ‘대여’하면서 ‘아이’라는 표현을 쓰네요. 결국 아기는 애완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말이죠? 근데 왜 한참을 안고 울어요? 전 이 부분이 전혀 납득이 안 갔어요. 누군가에게 말한 것도 아니고 혼잣 생각을 적나라하게 풀어놓을 때 어떤 그런 기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울어요. 무의식에서 쥐어짜내는 눈물일까요? (이 부분으로 이 여자의 여태까지의 고백이 용서받을 수는 없어요. 여기를 더 납득시키려면 뭔가가 더 필요해요. 그 여자의 과거 경험, 그 여자의 살아온 환경, 남성혐오를 느끼는 배경 등등)

 

이 소설을 다 읽고 독자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요? 전 처음 든 생각이 ‘여성혐오’였어요. 사실은 이런 정책을 만든 미래사회를 탓하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혹은 그 여자를 동정하게 만드는 건 너무 진부한가요? 그 정부도 이상하긴 해요. 출산율을 올리겠다고 생각한 정부라면 생리도 안 되고 임신도 안 되는 디스패치부터 금지시켰을 것 같아요. 낙태도 언제든 가능하게 해놓았다는 걸 보면 – 여성의 선택과 자유를 꽤 많이 보장하는 사회인 것 같기도 한데 – 그래서 출산율이 바닥인 걸까요? 그러다보니 고액을 주고 대리모로 일하게 만들고요? 그 사회는 생리대 용품 회사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가요? 그 회사들이 이미 다 망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전부 디스패치를 만드는 걸로 업종 전환을 한 걸까요? 또 인공자궁이 곧 대량화 되면 이런 여자의 배를 빌리지 않아도 되겠죠. 그건 다행일까요?

 

제가 불쾌했던 건 어느 디스토피아적 사회의 이면을 봤기 때문에 씁쓸한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여성혐오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불쾌했던 겁니다. 이렇게만 만들기에는 임신과 출산을 대하는 여성들의 심리가 훨씬 복잡하다는 걸 잘 모르시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뭐 그래요. 정말 이렇게만 생각하고 사는 여자도 있을 수 있죠. 그런 여자를 주인공으로 소설 쓸 수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그렇지만 또 이렇게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고 이런 리뷰를 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죠. 뭐.

 

+ 예민한 주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보니 댓글이 달렸네요. 댓글도 함께 읽어주시고 같이 생각해주시길 바랄게요. 앞서 주관적이라고 밝혔듯이 전 제 의견이 무조건 옳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더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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