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작가의 질문 ‘희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에 대해 짧게 답하자면, 나중에 묻지마 살인으로 신문에 작게 실릴 거 같아요.
자게에 올라온 소개글을 읽고 ‘결백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면’이라는 구절이 너무 신경 쓰여 읽기 시작했어요. 저는 이 글을 한 사람이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복합적인 층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보다는 그저 감정의 억압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어요.
저는 희민에게서 어떤 억압을 느껴요. 희민은 자신의 감정을 대단히 억누르고 있지 않나요? 자신의 가해 사실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희민은 피해자가 가진 죄책감은 부당하고, 가해자는 당연히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희민이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감정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의 가해 행위가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행위임을 떠올린다면 그의 행동과 감정은 완전히 반대로 갑니다. 그는 죄책감을 느껴선 안될 행위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위에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렇게만 적어놓으면 모순이지만, 죄책감의 억압과 해소라고 생각하면 가능해 보입니다. 피해자이기에 죄책감이 없어야 하고 그렇기에 죄책감을 감소시킬 수 있는 행위 – 가해 – 를 했고, 그럼에도 죄책감은 어째꺼나 실존하는 것이기에 가해 이후에야 자신의 죄책감을 받아들일수 잇었던게 아닌가.
소설이 희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니 추측할 뿐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고양이를 찍는 다른 사람들을 역겹다고 말한 장면에 주목하고 싶어요.
희민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줍니다. 하나, 둘이, 세시라는 이름을요. 그리고 고양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고 역겹다고 생각합니다. 소시민성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끝에 희민은 고양이의 이름을 다시 지어줍니다. ‘죄책감’ 이라고요. 그 부분을 읽자 사람들을 역겹게 보는 시선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괴리감. 자신의 죄책감을 알아주지 않고 가볍게 소비하는 이들에 대한 감정으로 읽는다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까요? 희민은 이해와 용서를 가장 싫어하는 단어로 꼽았으니까요.
희민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피해자일때도요. 그것은 부당하기에, 죄책감을 가져도 당연한 사람이 됩니다. 가해자요. 그 또한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맨 처음 묻지마 살인을 언급한 까닭이기도 해요. 앞으로도 이런식으로 내적 모순을 해결해 나간다면, 언젠가 사고를 치겠죠.
결국은 속편한 이야기입니다. 말로 하면 쉽지만 받아들이긴 힘들죠. 우리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해야 한다고 배워왔는 걸요. 그러나 결국 이 이야기로 귀결될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 지극한 감정들을 그저 받아들이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