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앞서서, 말하고 싶은 건 많아도 글 쓰는 재능은 없는지라 두서없는 글이 될 것 같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SF는 오랫동안 ‘공상과학소설’로 불려왔습니다. 일본 번역어를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일례지만, 현재도 그렇게 칭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 단어에 담겨있는 함의는 ‘공상’, 즉 현실에 없는 빈 상상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비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우리나라는 근현대 역사를 거치면서,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관념을 멀리하는 풍토를 쌓아올렸다고 생각합니다. 대박났거나 이름있는 소설, 영화들을 보면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없는 컨텐츠를 찾아보기가 힘들죠. 시사성이 없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인기를 끌기 어려워 보입니다. 소위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대해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그건 말도 안 된다”거나, “실제와 허구를 구분 못하게 된다”거나 “그게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라고 말하기 일쑤죠.
하지만 저는 현실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라면 감정이나 묘사를 중요시하는 일반 소설보다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갖춘 이야기를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룰에 따라서 풀어나가는 SF가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구요. 검증된 현대 과학 법칙을 꼼꼼히 따라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테드 창의 <일흔 두 글자>에는 사물의 진명을 연구하는 ‘명명학’이라는 가상의 학문이 등장합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소설 속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겪는 문제도, 해결 방법도, 결말도 작중의 보이지 않는 논리적 규칙의 틀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삶에 직접적인 교훈을 주거나 도움이 되진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구조는 완벽하게 돌아가는 기계장치처럼 아름답습니다. 골드버그 장치처럼요.
서론이 길어졌습니다만, <수행자들>의 흡입력은 대단합니다. 간결하고 힘있는 문장 덕분에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도달했을 때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수행자들의 열린 결말은 떡밥을 회수하지 못한 게 아니라, 회수할 필요가 없도록 잘 짜여져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모티프를 빌려 쓰고 있으면서도 작품 자체는 종교적인 색채는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답이 나와있지 않은 정보들을 제시하면서 짜임새있는 서스펜스를 부여합니다. 서로가 단편적으로 기억을 잃은 12사도들이 대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동굴’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 그리고 두 사도의 죽음과 그 진상, 그리고 결말까지 언뜻 보면 그 어느것도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지만요. 하나하나의 의미를 밝혀내고 전부를 얽어서 단선적인 줄거리를 만들고 싶은 욕망을 떨쳐내면, 이 작품의 성격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각각이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은유일 수도 있지만, 상징 그 자체로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면서 읽는 재미를 얻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작중에서 쓰인 모티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대목인 것 같아서 찾아봤더니 성서엔 이렇게 나와있더군요.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마가복음 15장 46절)
작중에서는 유다가 가지고있던 신호기, 돌이 무덤을 봉인하기 위한 돌임을 알 수 있군요. 즉 작중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많은 장치들이 ‘부활’과 연관이 있습니다. 동굴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혹시 기억을 잃은 채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모종의 루프에 갖힌 건 아닐까요? 웃으면서 11명을 배웅하는 유다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물론 이건 제 해석에 불과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