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포스트는 황금가지 서평단 이벤트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네크로맨서 부활. 시체들, 기상!”
그 날 밤은 하루가 고되어 몹시도 지쳐 있던 참이었다. 어느 작은 영지의 주민들을 괴롭히는 드래곤을 찾아가 발톱 아래에 바늘을 꽂은 다음 꼬리를 묶어 쫓아내고, 그의 레어를 쑥밭으로 만든 뒤 트롤과 오거들을 때려잡는 일… 은 아니었고, 휴학생의 본분인 여가 선용과 음주 활동에 힘썼던 탓이다. 드래곤은 커녕 핵 미사일과도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가히 역사적이라 할 만큼 평화롭고 안녕한 2018년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시대에 네크로맨서의 부활이라니. 현실 감각을 잊은 동아리 선배의 메세지에 살풋 웃음이 났다. 또 무슨 실없는 농담인가. 하지만 선배가 뒤이어 보내준 브릿G의 웹사이트 링크는 정말 말 그대로 ‘네크로맨서의 부활’이었다. (회고하자면, 그 소식을 처음 들었던 그 때의 나라면 정말 혈혈단신으로 드래곤의 레어에 찾아가더라도 OPG*를 낀 양 날뛰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영도가 돌아왔다. 이제는 ‘타자’, ‘농부’라는 수식어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지만, 그의 첫 소설 『드래곤 라자』를 기억하던 내겐 그 시절의 그를 일컫던 ‘네크로맨서’라는 별명이 마냥 생경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그 네크로맨서 작가는, 기어이 죽은 자들을 살려내고 말았다. 그것은 그가 만들어낸 세계의 일이었으며, 동시에 흉포한 여름에게 일방적으로 맞으며 싸우던 2018년 대한민국의 일이다.
보안관과 조수, 이번엔 정말 큰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만에 돌아온 작가가 선택한 인물은 ‘티르 스트라이크’이다. 9클래스 마스터의 대마법사나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엘프, 혹은 인간의 신의 화신(化神)이나 거대한 제국의 만병장과 같은 위대한 주인공을 기대한 이들은 돌아온 티르를 보며 아쉬운 웃음을 흘렸을지 모를 일이다. 티르 스트라이크는 앞서 말한 전설적인 영웅들과는 거리가 먼 직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르 스트라이크는 개척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관보, 즉 보안관 조수이다. 한 때 제국군 제 12군단 검술 사범을 맡은 경력이 있어 검을 잘 다룬다는 특기사항이 있으나, 어쨌거나 그의 직책은 결국 일개 보안관 조수인 것이다. 때문에 『오버 더』 시리즈에서 그와 그의 보안관 ‘이파리 하드투스’가 보여줬던 이야기들은, 꽤나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지만 결국 작은 개척 도시의 보안관과 보안관보가 수습할 만한(?)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솔직히 말하자면 티르 스트라이크에게도 조금 감당키 벅찬 이야기이다. 결말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남기자면, 솔직히 티르보다는 ‘그 분들’의 너른 관용과 아량 덕에 매듭지을 수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때문에 티르는 작품 곳곳에서 연신 당부한다. 요즘은 특히 ‘티르 스트라이크 하기’ 좋은 시절이 아니니 어지간하면 ‘티르 스트라이크는 하지 말라’고, 정말 못할 짓이라고 말이다.
이야기는 죽음에서 시작된다. 때문에 여타의 전작들과는 달리 비통하고 슬픈 분위기가 서막을 연다.
여섯 살 먹은 카닛 아이가 폐광의 무너진 환기공에 갇혀 열하루를 버티다 죽었다. 그리고 같은 날, 도시 근처를 지나던 마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나 한 소년만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는 이 본인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후의 경과와 수습에 있어 죽은 자는 자유롭다.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고 애도한 뒤 가슴에 묻고 삭이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죽은 자는 영향받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주변인들에게 부과되는 무거운 채무이며, 물려받고 싶지 않은 유산이다.
『오버 더 초이스』의 시작 또한 그러하다. 어린 딸 ‘서니 포인도트’를 잃은 도시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일행을 모두 잃은 소년 ‘덴워드 이카드’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떠난 이들의 여파가 미치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자유로운 세계 속에 가라앉은 진중한 의식과 고찰의 추
검술에도 수많은 문파와 유파가 있듯, 환상문학에서도 ‘이영도식’이라는 하나의 갈래가 있다 치자. 여타의 환상문학과 구분되는 ‘이영도식’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팬을 자처하는 많은 독자들은 아마 그 특징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유려한 문장과 시도때도 없이 독자들을 웃음짓게 만드는 언어유희, 세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입되는 세계관까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우리를 매료시키는 한 가지를 꼽자면, 상상으로 펼쳐진 허구의 세계 속에 현실의 철학적 사상과 사유를 교묘히 대입하며 만드는 그 무게감. 그것이야말로 ‘이영도식’의 백미이자 뚜렷한 특징이 아닐까.
인간 외의 이종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와 타아의 관계에 대해 표현했던 『드래곤 라자』,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 필멸자들이 갖는 삶의 가치와 약속된 휴식에 대해 다뤘던 『퓨쳐 워커』. 10년 간 한국의 환상문학 시장에 많은 작품들이 나왔지만, 우리가 오로지 이영도만을 기다린 것은 이러한 전작들에서부터 쌓아올려진 기대감 때문이었으리라. 그에 보답하듯 『오버 더 초이스』 또한 작가의 깊은 생각과 의식이 여실히 담긴 작품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인가? 답을 하기에 앞서, 문득 묻고 싶어진다. 작가의 팬이라면, 당신은 혹시 이 말을 기억하는가?
”죽음은 약속된 휴식이다.*“
『오버 더 초이스』에서 이야기의 시작은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죽음으로 비롯된 이야기는 ‘부활’이 이끌어간다. 죽음을 부정하고, 또 부재시키는 기적의 실현. 언뜻 듣기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재회처럼 느껴지지만, 티르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조금 더 차갑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된다.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한한 삶을 가진 생명들의 종착이며, 위에 말했듯 삶과 함께 주어진 약속된 휴식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듦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생애의 의미를 찾게 되고 삶의 존엄성을 인정받는다. 그러한 죽음이 부활로 인해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바로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상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티르를 비롯한 작중 인물들은 그러한 부활이 야기하는 삶의 가치 파괴에 생각하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 중 덴워드가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며 드러낸 입장은, 지켜보는 우리들마저도 부활에 대한 고찰을 느끼게끔 한다.
“부활은 말입니다, 스트라이크 씨. 그 행위의 대상을 죽어도 별 상관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 같군요.
(중략) 목동이나 양치기, 마구간지기는 자기들이 소와 양과 말들을 사랑한다고들 하지요. 사실 자유를 빼앗고 뭔지 이해도 못 할 노동을 시키고 필요하면 언제든 죽이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게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라는 식으로 반응하진 않습니다. 어쨌든 때 되면 먹이고 물 길어다 마시게 해주고 추울까, 더울까 신경 쓰고 맹수로부터 지키려 애쓰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건 죽으면 되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뻔한 이야기라서 떠올리기 어렵지만, 진짜 이유는 바로 그겁니다. 죽으면 되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그러면 그런 이기적인 사랑마저도 없어지겠지요. 왜 힘들게 보살핍니까? 아무렇게나 대해도 됩니다. 내팽겨쳐둬도 되고, 귀찮고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다 죽여도 됩니다. 그리고 아쉬워지면 되살려내면 되고요. (후략)” – 본문 중에서 일부 발췌
삶을 영위함으로써 그 존엄성을 포기할 것인가, 죽음을 포용함으로써 삶을 포기할 것인가.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우리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질문이지만, 티르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버젓이 펼쳐져, 그들 앞의 선택으로 놓이게 된다.
’만약에’로 시작되는 작은 가정과 상상만으로도 크게 뒤틀리고, 변화하며, 창조되고 또 붕괴할 수 있는 세계. 판타지의 세계란 그러한 세계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세계의 인간에게 늘 ‘질문’이란 공을 던지고 받기를 반복한다. 세계는 다르지만,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중한 의식과 고찰의 추가 허무맹랑하지 않은 무게로 느껴짐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가
첫째. 여전하시다. 10년의 시간 동안 결코 나무만 키우시진 않으셨으리라 확신한다.(물론 나무를 오래, 정말 아주 오-래 보긴 하셨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어이 소재를…) 미진하게나마 글을 배우는 입장으로써, 계속해서 쓰고 읽지 않으면 감각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안다. 때문에 이 작품은 내게 있어 ‘오랜만에 썼다’가 아닌, ‘그 동안 계속해서 써 왔다’라는 10년만의 기다림에 대한 회신이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 지 모르지만, 그 기다림이 결코 막연할 것 같지만은 않아 참으로 기쁘다.
둘째. 호불호가 갈릴 만 하다 생각한다. 우선 주인공인 티르의 위치가 관찰자적 위치로 낮아졌다는 느낌을 다소 받았다. 보안관보답게 열심히 뛰고, 구르고, ‘티르 스트라이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의 전작들에 비해 그의 행동은 사건의 흐름에 크게 개입되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부분도 사실 쌍방 간의 원만한 합의(물론 현실의 합의가 그렇듯 이쪽의 합의도 어느 한 쪽의 넓고 깊은 아량과 선처가 동반되었기에 가능하긴 했다)가 아니었던가. 다만 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보니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감정과 사고의 흐름은 매우 면밀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시작부터 전제된 분위기와 인물들의 심리 변화로 인해 많은 갈등과 긴장이 오가는 것 같지만 사실 행동 전개로만 보면 꽤나 평화로운(?) 이야기 구조 역시 어느 초장이 후보*나 길잡이*와 같은 무용담을 기대하는 이들에겐 조금 아쉬울 수 있을 듯 하다.
중반부 이후부터 나타나는 티르의 자아에 대한 혼란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닌데, 1인칭 시점의 특성적 한계로 인해 읽는 독자들로서는 다소 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또한 호불호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셋째. 사실 평가란 무의미하다.
열한 살의 나이로 처음 『드래곤 라자』를 접한 이후, 이영도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하나의 지침이자 방향이었다. 십오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발자취를 곧게 따라가진 못했지만, 빙 돌고 돌아서라도 언젠가 도달할 나의 목표에는 언제나 그에게 닿아 있다. 그런 나에게 『오버 더 초이스』는 ‘따라와’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정표에 평가란 무의미하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이정표는 본분에 완벽히 충실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작품에 대한 평가에 대해 감히 ‘완벽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 완벽함은 이영도라는 작가를 흠내지 않는 완벽함이며, 동시에 한국 환상문학에 있어 또 한번 그의 이름을 새겨놓는 완벽함이다.
이 책을 추천하자면
상상 그 이상의 세계를 느껴보고 싶은 독자
라이트 노벨이나 허술한 판타지로는 독서의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
삶에 대한 우울함을 느끼는 독자
천진난만하게 웃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좋아하는 독자
이영도라는 이름에 환호하는 좀비 독자
1* 오거 파워 건틀렛 (Ogre Power Gauntlet).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주인공 ‘후치 네드발’이
착용하던 아티펙트. 오거의 힘을 낼 수 있다.
2* 소설 드래곤 라자에 등장하는 인물 ‘루트에리노 바이서스’가 남긴 명언.
3* 소설 드래곤 라자의 주인공 ‘후치 네드발’
4*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주인공 ‘케이건 드라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