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게임과 같은 단편소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로그라이크(Roguelike) (작가: 붕붕, 작품정보)
리뷰어: 이브나, 18년 6월, 조회 150

평범한 일상을 살던 소년 장하민이,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서 어떤 건물에 뛰어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비일상 이야기.
어디서부터가 전조였을까요, 아니면 다만 우연이었을까요. 소년은 극히 평범하게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아무 건물에나 들어갔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그 건물에 갇히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마시려고 돈을 넣었더니 자판기에 잡아먹혀 다른 세계에 떨어지고 맙니다.

처음에 그 자판기에서 장하민이 고를 수 있는 음료는 코카콜라 하나 뿐이었고, 마치 게임을 시작했을 때 들릴법한 동전 떨어지는 효과음과 8비트의 전자음악이 들려오면서요. 어쩌면 그 때부터 장하민의 인생은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네요. 게임 속 세계에 빠져버린 평범한 소년. “건물에 들어온다”는 분기점을 지나버린 그에게, 선택지는 코카콜라처럼 하나뿐이었다는 의미인 것도 같구요.

그가 아무 대비도 없이 떨어진 세계는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황야인데, 과연 그가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복장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세계로 떨어진다는 건 그런 거죠. 대비할 시간도 여유도 없이, 갑작스레 맞이한 추위와 생전 처음 맞딱뜨린 괴물같은 재앙이요.

구원자인 줄 알았지만 최초로 장하민을 죽여버린 그들은, 난쟁이였죠. 인간과 다소 닮았지만 얼굴 생김새와 체형 등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흔히 “인간종”과 다른 종족으로 분류되는 이들이요.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몬스터란 흔히 “이민족”의 비유라고 이야기되기도 하구요. 장하민이 처음 마주치고, 그를 죽인 이들이 난쟁이라는 건 그들이 “적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상대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자판기 속의, 혹은 그 너머의 세계에서 죽어도 죽지 않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죠. 갇힌 건물 안의, 자판기 앞이요. 그가 원래 갖고 있던 돈은 6천원이고, 첫 판에 패배해서 5천원이 남았어요. 그리고 자판기 속의 음료는 이번에는 솔의 눈 뿐이죠. 그리고 동양풍 이세계에서 또다시 난쟁이와 마주친 장하민은, 이번에는 운빨인지 무기를 확보하고, 난쟁이 하나를 죽고 스스로는 죽임당함으로써 1천원을 도로 얻어요. 그가 이세계에서 난쟁이를 반드시 죽어야, 아직은 의미도 모를 기회를 얻게될 수 있다는 의미이겠죠.

그리고 그는 3번째 판에서, 갖고 있는 5천원을 모두 털어서 넣었어요. 선택할 수 있는 음료는 여명808. 매우 큰 도박이죠. 생각해보면 이 때 장하민이 패했으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단 1번의 기회도 남지 않은 그는, 폐쇄된 건물 속 자판기 너머의 이세계에서 그대로 죽어버렸을까요? 장하민은 당시 그런 생각을 안 한 걸로 보이는데, 생존에 도움이 안되는 걸 알아서 생각을 안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대신 보리밭에 떨어진 그는 가죽갑옷과 롱소드를 얻어요. 갑옷을 얻으면 생존률이 올라가죠. 역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인생은 한 방이군요. 투자 없이는 돌아오는 게 없죠. 그리고 그는 돈을 몰빵한 그 판에서 살아남고, 영겁과도 같은 윤회를 거치며 승리하고 패배했을 거에요. 적어도 완전히 죽어버리지는 않고. 그리고 그는 자판기 앞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아요. 아마 스스로가 더이상 나이먹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부터, 이겠죠.
80억을 자판기에 집어넣고 꼬냑 1갤런을 선택한 그는 로켓엔진을 탑재한 우주전함의 장교가 되어, 지난 항해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악연이었던 이종족-난쟁이들의 몰살을 계획해요. 그들을 죽이면 이 끝나지 않는 게임을 끝낼 수 있단 확신을 가진 것 같은데, 그건 아마도 영겁의 윤회를 거치면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본능적인 감일 수도 있어요.

장하민은 그들과의 싸움이 끝나면 현실세계의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지만, 개의치 않아요. 이 영원한 게임을 끝내고싶기 때문에. 그리고 승리를 기대하며 항해를 지속하죠.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장하민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승리하고 난쟁이들을 죽인 만큼의 지폐다발에 깔려 죽었는지, 혹은 건물을 탈출해서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게 되었는지, 혹은 그 뒤에도 게임은 끝나지 않고 영겁의 시간을 또 살아가야 했는지도요.

장하민이 영겁의 윤회를 거치고 자판기에 80억을 넣는 대목에서, 역시 이 소설은 현실의 은유같다고 생각했어요. 난쟁이들은 싸울 수밖에 없는 숙적 혹은 운명 그 자체이며, 자판기를 통해 영원한 게임을 하는 장하민은 룰을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보통의 사람들과 같죠. 그리고 게임이 끝난 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행복하게 게임을 지속하는 장하민은, 필멸을 예감하면서도 자신의 전투를 지속하는 사람들과 닮아있죠. 여기서 장하민의 목표는 난쟁이들을 죽이고 게임을 끝내는 것이었고, 보통 사람들의 인생에서 목표란 또 다른 것이겠지요.

게임도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당연히 인간의 인생관이 들어가겠지만요.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내용전개와 결말이라니! 뒷맛이 굉장히 산뜻하고, 단편을 읽은 것만으로도 기승전결이 잘 갖춰진 게임 한 판을 엔딩까지 다 본 기분이어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장하민의 이후 결말도 궁금하고, 이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해도 작가님이 쓰신대로라면 굉장히 재미있을 거 같네요.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싶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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