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신작을 내주셔서 좀비는 행복했습니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오버 더 초이스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시젤, 18년 6월, 조회 229

 이 감상 리뷰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오버 더 초이스를 다 읽지 않으신 분이라면 이 글을 보지 않으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좀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팬덤의 일원으로서, 이영도 작가님 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즐거움에 차오릅니다. 일단 팬심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이지만, 전작들에서 증명된 필력 덕분에 망설일 필요 없이 믿고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님의 작품들에 담긴 특유의 매력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덕분입니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도 그런 매력들을 한가득 느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아서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서도 좋은 글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영도 작가님의 작품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이영도 작가님의 필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들의 작품도 물론 좋은 작품이지만, 어필하는 매력에 있어서 서로 다른 곳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더 간단히 정리하면 작가님만의 개성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이영도 작가님의 작품에서 만났던 그 느낌을 다시 맛보려면 결국 작가님의 작품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전작인 오버 더 호라이즌부터 시작해서 이번 오버 더 초이스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에는 특유의 매력적인 세계관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상상도 못 했던 다양한 종족들이 어우러져 산다는 점이겠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등장하는 오크 상사와 트롤 우체국장, 늑대인간 음악가는 처음 이 시리즈를 접했던 순간의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예전에 지인에게 오버 더 호라이즌을 권유해줬을 때 그 친구가 보였던 재밌는 반응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군요. 그 친구는 처음 몇 장을 넘기다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응? 잠깐만, 오크? 트롤?’ 너무 생생하게 놀라버려서 옆에서 보던 저까지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이것도 이제 꽤 오래전의 일이군요.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다양한 종족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사실이 더 이상 대단한 개성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꽤 많은 작품에서 시도해온 설정이 되었죠. 하지만 작가님의 작품은 여전히 저를 흥미롭게 합니다. 기존에 몬스터로 취급받던 모든 종족이 다 같은 인격체로서 대접받는 단순한 설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거기에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독창적인 종족들을 섞어 넣는 방법으로 그 매력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제이는 물론이고, 야채 뱀파이어라니! 물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고 기존의 것들을 적절히 변형시킨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부끄럽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시도를 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작가님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이런 독창성은 종족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해당하는 악기를 시작으로, 세대 간에 전이되는 마술사와 당사자도 모르게 구현되는 마법에 대한 개념이 그렇고, 거의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식물이라는 개념 등등이 그렇습니다. 모두 흔히 볼 수 있는 설정들은 아니죠. 세계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이런 기발한 상상력이 읽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캐릭터성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가 없군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인상 깊은 캐릭터들이 많습니다. 떠나간 자식에 대한 비통함과 소름끼치는 광기를 연이어 보여준 포인도트 부인, 놀라울 정도로 냉정한 이성과 연인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동시에 가진 늑대인간이라든지, 혼자 봉수대에 거주하며 거침없이 세상을 비웃는 유니콘, 마을의 마스코트 격인 두 악동 꼬맹이, 그리고 언제나 큰 웃음을 선사해주는 화가이자 시인이자 양조사이자 발명가이자 우편행정가이자… 으음, 너무 많군요. 아무튼 안셀. 더 적고 싶은 캐릭터가 많지만 계속 적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이 나왔는데 전부 모자랄 것 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티르를 위해 지데로 변한 마가목, 서니를 위해 서니로 변한 비누풀 등등 심지어 식물들마저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했습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각자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전체 스토리의 큰 줄기를 따라가면서도 이렇게 많은 작은 이야기를 구석구석 잘 배치해두신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 모든 캐릭터들이 전부 제 안에서 소중해졌습니다.

 

작가님 작품들을 볼 때마다 매번 생각하는 건데, 수많은 장점 중에서도 판타지와 철학을 조화롭게 하나로 합칠 수 있다는 점이 작가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 같습니다. 머리 아픈 주제를 다루면서도 특유의 문체로 분위기를 때론 재밌게, 때론 진지하게 술술 풀어나가시죠. 판타지에 철학을 담는 것이 얼핏 생각하기엔 쉬울 것 같지만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철학도 담겨있으면서 동시에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을 쓴다는 것은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잡겠다는 것이고, 당연히 순수하게 철학만을 논하거나 그저 재밌기만 한 판타지 소설을 쓰는 것보다 훨씬 고난이도입니다. 필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판타지 소설에 억지로 철학을 집어넣으려다간 그 내용이 독자들에게 별로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도 않고 소설의 재미는 재미대로 급감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경우를 재료를 다룰만한 실력이 없는 요리사에 비유해서 표현하고 싶군요.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식의 비유로 작가님을 묘사하자면, 내공이 탄탄한 셰프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가격이 책정되면 그다음엔 거래도 가능해지거든.”

“여기가 신의 땅이라면 어떻게 악이 존재하겠어요?”

“지금의 당신은 과거의 당신을 닮은 자일 뿐 아닌가요?”

 

이번 작품에 등장한 대사 중 일부입니다. 많은 분이 읽으면서 느끼셨을 테지만 전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철학적 담론들이죠. 예를 들어, 소설이 거의 결말부로 달려가던 시점에서 등장한 저 마지막 대사는 그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군요. 예전에 철학 교양서를 보다가 읽었던 내용이 이렇게 판타지의 형태로 재밌게 묘사되는 걸 보니 뭔가 반갑기도 하고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걸 이렇게 엮을 생각을 하다니!’였습니다. 소설의 재미는 그대로 살리면서 역설이 담고 있던 생각할 거리는 또 고스란히 전달해주는 그 실력에 새삼스레 다시 감탄했습니다.

 

너무 좋은 평가만 줄줄 늘어놓은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 하나만 언급하겠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작가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만, 독자들의 갈증을 유발하는 엔딩 방식은 여전하시군요. 물론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다 전달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애타게 기다려온 팬들을 위해 서비스 정신을 조금만 더 발휘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소설의 주제가 끝나고 나니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져서 버려진 느낌입니다. 저희한텐 소중했던 등장인물들인데 말이죠. 마을로 돌아온 포인도트 부부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부를 위해 서니들로 변했던 식물은 아무래도 다시 식물로 돌아간 모양이니 결과적으로 서니를 되찾는 것은 실패한 셈인데 그 뒤의 행보가 걱정되는군요. 그 부부가 결국 서니의 바람대로 서니를 잊을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전에 포인도트 부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더 이상 마을에서 살 수는 있나요? 이파리 보안관은 봉수대에서의 육거 사건 이후 후반부 전개로 가면 사실상 실종상태로 변해서 더 이상 등장을 안 하더군요. 물론 그 이후의 전개상 이파리 보안관이 유의미한 역할을 맡기 힘들었다는 것은 압니다. 아예 인간을 위해 변한 식물 그 자체였던 지데, 각자 자신들을 위해 변한 식물이 존재하는 티르와 마하단 등에 비하면 이파리 보안관은 딱히 식물왕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그 강인한 보안관이 그를 위해 변해줄 식물이 필요할 만큼 약한 인물도 아닌 것 같기에 더 이상 스토리에 크게 관여할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난 후 엔딩에서만큼은 살짝 출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마을사람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시리즈 전체에 걸쳐 그 상징성이 굉장히 큰 캐릭터인데 너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갑자기 비중이 증발해버린 그 캐릭터들도 독자들은 가슴속에 소중히 품어오며 책을 읽어왔을 터인데 이렇게 간략히 작품을 끝내시면 읽는 이들은 짙은 ‘삭제감’을 느끼게 됩니다.

 

막상 다 써놓고 보니 아쉬운 감정이 듬뿍 담겨서 마지막 불평이 과하게 길어진 감이 있군요. 모쪼록 작가님의 작품을 몰입해서 읽었던 한 팬의 귀여운 불만 정도로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모든 좀비 여러분이 좋은 밤 되실 수 있길 바라며 저는 이만 네크로맨서님의 다음 부름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러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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