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사파이어 공주 (작가: 도련, 작품정보)
리뷰어: 블루라쿤, 18년 5월, 조회 56

행복의 조건

우리는 흔히, 행복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을 쉽게 꺼낸다. 네가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는다면 세상이 달라질 거야. 네가 행복하지 않은 건 네가 행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 쉽게 뱉는 말들에 우리는 ‘그럴싸한걸.’ 쉽게 생각하고,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나의 문제로 돌린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이 합쳐진 말이다. 즉 사람의 사이, 사람의 틈, 즉 관계적인 의미에서 타자와 연결되는 존재로서 바라보고자 한 관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타자와는 완벽히 구분되는 특수적 개인과는 구분된다. 공동체적 사람과 특수적 개인은 서로 다른 영역을 지니고 있지만 그 영역은 엄밀한 구분으로 나뉘지 않는다. 매 순간 상황에 따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존재는 다르다. 동지와 함께 있을 때는 공동체적 사람으로서, 적들과 함께 있을 땐 특수적 개인으로서 추구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변화된다. 그럼에도, 인간이라고 부르는 순간 주체는 서로 협력적이든 배타적인간에 타자 혹은 세계와 연결되는 순간에서만 올곧이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주체와 타자는 언제나 연결되는 순간에만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려주고, 이와 함께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구분되는 서로 주체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증명하는 문제로서 바라본다면, 행복이란 인간의 관계성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공동체적이고 관계지향적인 인간을 발견한다. 즉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성의 관점에서, 한 개인에게 부과되는 물건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개인에게 부과되어, 노력 등으로 획득 가능한 성질의 물건이 아니기에, 행복은 개인의 책임이 아닌 개인과 같이 관계를 맺는 타자에게도 책임을 같이 물어야 한다. 즉 행복은 타자와 개인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움직임이다.

공주에게 찍혀진 낙인을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다. 만나는 타자에 대해서 자연스레 떠올리는 저럴 것이라는 기대 혹은 불안을 이미지화라고 친다면,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매우 익숙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매 순간 타자와 관계 맺으며, 그 타자는 이러이러하다는 화석화된 관념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개인에게 부과된 화석화된 관념들은 현실과 괴리되며 곧 이상적 이미지와 현실에서 변화되는 주체는 언제나 대립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 상태에 도달하면 흔히 뱉는 문구가 있다. “도대체 네가 아는 내가 뭔데?” 우리는 이때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그는 내가 아닌 구분되는 다른 주체이다. 한계가 있더라도 우린 서로 양립되어야만 한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사람은 언제나 변화되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면모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허나 이러한 노력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야 한다. 즉 한 개인에게 부과되는 일상적인 낙인들, 이미지, 고정관념은 결국 괴리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한 개인이 희생되는 일은 빈번히 벌어진다. 그런 상태에서 행복이란 단지 허상에 불가하게 될 것이다. 소외되는 자들이 소외되는 것은 그들이 소외될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에, 그들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관계 맺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나태하며 태만하다는 증거다. 그들이 소외되는 것은 우리가 소외하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근사한 말로 쉽게 뱉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소외받는 존재를 알아야 하고 그들에게 낙인 부과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연 누가 진정으로 정직한가? 누가 진정으로 자격이 있는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모두가 돌로 던지려 할 때, 예수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우리는 과연 절대적으로 소외받지 않는 존재인가? 타인에게 부과된 낙인을 무시하면서 과연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가? 나는 아니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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