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혼식』에서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들이다. 이는 작 중 의뢰인이 겪은/는 에피소드들로 제시된다. 소설에선 크게 두 가지다. 돈과 여성성. 의뢰인은 이 문제들 때문에 비혼하고, 친구 사이가 깨질 것도 각오한 채 축의금 따위를 돌려받으러 돌아다닌다. 대체 돈이 뭐길래. 여성성이 뭐길래.
돈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이상 계속해서 문제대상일 것이다. 개인이 노동해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고 그 임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인 이상 그렇다. 작 중 의뢰인은 회사 생활을 하나 최대한 절약해도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집과 안전. ─ 의식주를 충족할 수 없다. 빈곤은 연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의뢰인이 ‘나’에게 들려준 첫 에피소드를 보면 빈자와 부자 간에 이미 단단한 벽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부의 재분배 등 해결 대책을 말하진 않는다. 단지 의뢰인을 통해 이런 개인이 사회에 꽤 많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할 뿐이다.
경제체제가 바뀌면 돈 문제도 어떤 식으로든 바뀔 것이다. 그러나 여성성은 그렇지 않다. 소설에서 여성성은 의뢰인이 겪은/는 연애 · 결혼 문화를 통해 언급된다. 소개팅 남성들이 요구하는 아름다운 여성 · 보호받는 여성 등이 그렇고, 결혼한/했던 지인들에게 듣는 집에서 내조하는 여성 · 아이 돌보는 여성 · 친정을 받드는 여성 등이 그렇다.
여성성이 왜 문제인가. 문제가 아니라면 거부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성은 생물적 성이 여성이란 이유로 사회에게 입힘 당한 여성들이 ‘맘스플레인’한다든지, 참다가 이혼한다든지, 남성들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통해 실질적으로 문제화된다. 그리고 아름답지 않은 모습 · 더치페이 · 이혼 · 비혼 등으로 반대된다. 소설은 단순히 반대만 하지 않는다. 대안을 제시한다.
의뢰인으로 제시된 대안은 여성성이 없는 여성,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조금뿐인 여성,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다. 스스로가 삶의 주체로 어떤 식으로 살지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주체적 삶이 중요하다고까지 강변하진 않지만, 스스로가 자신 삶의 주체가 될 필요는 있다고 얘기한다.
작가가 이를 그리는 모습은 경쾌하고 희학적이다. ‘나’ 전일도와 오빠 전가정과 의뢰인 간 케미는 물론이고, 그들이 당면한 문제 ─ 의뢰 · 사랑 · 축의금 등 ─ 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그렇다. 다루는 주제가 엄청 심각한 것은 아니어도 분명 중요하다는 점을 볼 때 읽는 이들에게 무리 없이 다가가는 좋은 서술방식이다.
그러나 어느 글이나 아쉬운 점은 남는다. 이 글 『나의 비혼식』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오직 여성의 시각에서만 쓰였다는 것이다. 남성이 사회에게 입힘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남성 또한 분명히 사회에게 피해 본 점이 있는데 말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그런 것인가? 그래서 먼저 여성의 시각에서 썼다면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계속해서 여성의 시각에서 글을 쓰겠다면 여성이 겪는 더 많은 사회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혹은 이미 찾아놓은 문제들을 더 디테일하게 파헤치든지. 또한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가 왜 문제인지에 대해, 그에 대한 대답이 타당한지도. 맘스플레인처럼 여성 내부에서의 문제를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잘 쓰니 앞으로 찾아 읽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