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인 ‘세미콜론’과 안드로이드 이름인 ‘에밀’의 의미에 대해…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 (작가: kojoman, 작품정보)
리뷰어: 후더닛, 18년 3월, 조회 42

제목이 세미콜론(;)이네요.

하필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세미콜론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군요. 마침표와 다르게 다음의 문장이 관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호로 특이한 것은 다음에 오는 문장은 앞 문장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문장이어야 한답니다.

다시 말해, 독립적인 두 존재가 단절과 배제가 아니라 공존과 존중의 관계를 이루는 것(다소 의미를 부풀려 말한 것이긴 합니다만)이 ‘세미콜론’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소설에 참 잘 어울리는 제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소설은 인간과 안드로이드라는 전혀 다른 두 존재가 그런 관계가 되어가는 이야기니까요. 사랑이라는 단어라 어울릴만큼 아끼고 보살피는 그런 관계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소설의 내용을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에 있어 안드로이드의 비중은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이죠. 즉 이 소설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처럼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서로 주체가 되어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에 가깝죠. 자신이 조각한 조각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마치 살아있는 연인을 대하듯 했다는 조각가 이야기 말이죠. 신도 그 사랑에 감동하여 조각상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죠.

이와 비슷합니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인물을 중심에 두고 전개됩니다. 하나는 홍윤이고 다른 하나는 정다인이죠. 모두 남자입니다. 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같이 안드로이드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정다인의 안내로 버려진 안드로이드를 스스로 수리하는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취미 활동을 가지게 됩니다. 밝힐 수 없는 것은 4년 전에 일어난 안드로이드 반란 사건을 인간과 똑같은 안드로이드를 가지는 게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도 안드로이드를 향한 이 둘의 애정을 막을 수 없었죠.

그 후 수년 동안 둘은 계속 안드로이드를 살리는데 매진하게 되는데 하지만 둘의 입장이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홍윤은 오로지 다시 살리는 것만 생각한 반면 정다인은 안드로이드에 관한 지식을 넓히는데 더 관심이 있었죠. 그렇게 홍윤은 안드로이드를 전혀 자신과 별개가 아닌 존재로 생각했지만 정다인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 여겼습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기계는 기계라고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누가 안드로이드와 사랑에 빠지는 지 알 수 있을테죠. 네, 홍윤 맞습니다. 홍윤은 오랜 시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되살리려 한 안드로이드 ‘에밀’에 대해 애정을 가지게 됩니다. 추워 보여서 담요를 덮어줄만큼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말이죠. 물론 정다인은 그런 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윤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정다인이 윤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정다인이 윤을 부러워하는가?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 말이죠.

이 소설은 단순히 기계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근본 태도에 대해서도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것을 정다인과 홍윤의 대비를 통해서 보여주죠.

정다인은 자기 관리가 뛰어난 인물인데 그것은 항상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쓰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홍윤은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이 좋은 것을 할 뿐입니다.

정다인 삶의 중심엔 타인이 있지만 홍윤 삶의 중심엔 자신이 있습니다. 정다인은 생각합니다.

홍윤이 주어진 삶을 더욱 충실히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정다인이 훙윤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러한 전적인 자기 주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세미콜론)’은 그러한 자기 주도의 삶을 긍정하는 소설입니다. 둘을 세미콜론처럼 이어주는 사랑은 바로 그렇게 자기 삶에 온전한 주체가 될 때 가능하며 그런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방해와 장애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라며.

그래서 안드로이드의 이름이 ‘에밀’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에밀’은 루소가 자신의 교육 철학을 소설의 형식으로 발표한 작품의 제목이죠. 거기서 그는 진정한 교육은 외부의 그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에 있는 자유를 한껏 발현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얻는 경험이 가장 중요한 교육의 자산이라고 말이죠.

사랑이 그렇죠. 수영처럼 빠져봐야 사랑을 할 줄 알게된다는 말도 있듯이 사랑이야말로 교과서로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이 소설이 조금은 지루하게 여겨질만큼 안드로이드를 복구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담고 있는 것은 루소의 ‘에밀’처럼 홍윤이 안드로이드에게 가지는 애착의 경험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어서겠죠.

이처럼 자유와 사랑, 이 두 가지는 에밀이란 이름 속에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 삶이 전적으로 자기 주도가 될 때 진정으로 찾아오는 것이군요. 제목은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살면서 수없이 떠올렸을 이 질문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 더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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