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쓰기 전에, 브릿G가 설립되기 이전에 미리 리디북스를 통해 황금가지 번역본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미리 접하였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기 전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많이 떨어졌기에 알 수 없었다. 책을 읽기를 좋아해도 흥미가 가는 장르도 없었고 겨우 ‘석유 없는 세계의 미래를 다룬 책’을 한 권 읽는 정도였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자, 그의 작품을 읽은 후, 그의 능력’만’을 존경하게 되었다. 존경하게 된 연유는, 그가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정신이상으로 인한 발작으로 사망하고, 아버지 대신 그를 지원하던 외조부가 갑작스럽게 작고하고, 가세가 기울어가는 것을 본 어머니의 스트레스를 좋지 않은 형태로 계속 받아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신화를 만개시키고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를 단숨에 유행시켰기 때문이다. (능력’만’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백인안전주의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인안전주의’라고 정의한 이유는 백인우월주의를 보인다고 하기에는 비백인차별주의자치고 백인을 칭찬하는 모습을 주변인의 증언과 기록된 문서로 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있겠는가? 단 한 사람이, 인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공포 신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겉으로는 대학 교수직을 맡을 듯하게 생겼지만, 속은 빵모자를 쓰고 한 폭의 그림을 그려 세상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순수한 화가 기질이 있는, 성격이 평범한 한 남자가 방대한 신화를 쓰고, 그 신화의 양분을 다른 창작자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모자라서 동일 장르의 후배 작가 양성의 토양으로 쌓아올렸다. 물론 그 신화가 그가 살아 있을 시절에는 유행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그가 죽고 나서야 한 거대한 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봐서는, 실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품들의 힘이 너무 거대한 나머지, 러브크래프트의 작가 개인으로서의 삶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개인도 충분히 주목받았지만), 크툴루 신화 및 코즈믹 호러의 문학사가 학술적으로 정립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전자의 이유는 러브크래프트라는 한 개인의 자아가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작품에 먹혀 잊혀지는 듯한 개인적인 슬픔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이유는 비록 러브크래프트의 삶이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로 인한 불행의 연속이라 흥미로운 연구 소재로 적합하여 주목받았으나, 그의 작품을 본 작가, 독자, 연구자들은 당대 혹은 그 이후의 사회 문제 해결책 논의로 확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불행한 삶에 안타까움을 표하였으나, 안타까움을 넘어선 대책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크툴루 신화 계열의 후계 창작자들과 연구자들의 동향에 대해 무지하여 잘못 리뷰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나는 러브크래프트를 알았음에도 이제야 러브크래프트가 겪은 사회적 불행이 두 번 다시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나타나지 않도록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문학이란 사회 참여에 직접적으로 힘쓰지 못하더라도 간접적으로라도 건전한 영향을 줄 수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거시적 관점의 사회 참여라도, 미시적 관점의 사회 참여라도, 상관없다. 창작가의 작품이 사회 문제 해결의 도화선이 되어도, 도화선이 되지 못하더라도 단 한 사람에게라도 삶의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면, 어떤 작품이든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무엇일까? ‘신화’의 특성 중 하나가 아닐까? 이 특성이 ‘서양 신화’와 ‘인간의 본성 중 내면 초월의 성공 신화’ 등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신화는 반드시 승리를 지향하며, 패배를 용납하지 못하는 관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신화는 결국 인간에게서 쓰여진 이야기며, 이는 인간은 ‘성공 신화’를 달성해야만 속세로부터의 해방감을 맞이할 수 있을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성공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다. 물질적인 성공이 예로부터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공통적으로 맞이하고 싶은 진정한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불굴의 초월 의지를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이다. 신화는 설령 인간이 이기지 못하더라도, (특히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사이의 문제에서)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한다. 그리스 신화는 엘리트주의를 따르는 과 샤머니즘을 따르는 조차 초월 의지를 내면의 악과 떨어지지 못하게 타협시키면 진정한 초월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북유럽 신화는 엘리트주의과 샤머니즘을 따르지 않는의 동등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전사로서 자신만의 순수한 힘으로 스스로를 극복하고자 하는 초월 의지를, 켈트 신화는 북유럽 신화처럼 그 주의와 그 종교를 따르지 않으나 신성없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오만으로 인한 실패를 막으려는 ‘기아스(Geis)’로서의 상호 제약이라는 독특한 초월 의지를 보인다.
흔히 크툴루 신화에는 초월 의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망가질 수 있다. 그것이 이 신화의 일반적인 주제며, 다른 주제는 상당히 인상이 옅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는 불행한 생애로 인한 정신적인 문제를 문학으로 극복하려는 초월 의지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인 ‘이육사(李陸史)’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초인’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는 ‘극복 의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초월 의지는 아마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우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생명경시적 실험을 소재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며, 뱀파이어가 자행한 끔찍한 짓을 삼촌과 함께 조사해 진실을 밝히려는 주인공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며, 급속냉동으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 인물을 그리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기에 그는 (문학계의 문학성 평가와 별개로) 마음만 먹으면 인간 찬가의 작품을 쓸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른 작가들과 합작을 그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크툴루 신화의 전설을 남겼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스스로의 의지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어째서 미지의 공포적인 존재로부터의 불가능한 탈출을 자신의 작품 세계로 삼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성격을 처음에는 두루뭉실하게나마, 요절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반추하여, 코즈믹 호러로 정의한 것이 아닐까?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독서에 매진하였으나, 수학에 약할 만큼 체계적인 암산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가 다양한 소재에서 시작된 작품 요소들을 느슨하게 연결하여 정교한 설정으로 구성하는 경향이 적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자신의 단점을 알았기에, 러브크래프트가 설사 내면적으로 코즈믹 호러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더라도, 정작 타인에게 설명하길 어려워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정신적인 문제와 내향적인 성격으로 인해 강화되었을 뿐이지, 실은 러브크래프트의 정신 세계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어 보인다. 러브크래프트가 사교를 중시하였음에도 내향적인 성격과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자신의 내면과 정보를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였기에, 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도 진척시키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황적인 근거를 제시하자면, 사람이 불운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의 내면을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감과 세상에 대한 불신감으로 좌절시키는 경우를 이미 여러 번 경험하였기에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은 절대로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기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결국 자아가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은 절망적일 때 이 사실을 유지할 이성을 가리는 것도 모자라 분노와 증오로 바꾸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분노와 증오에 의해 피해를 입기를 거부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신체는 방어기제로 감정의 표출 대상을 다른 인간에게서 취미로 승화함으로서, 감정과 스트레스의 무감각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코즈믹 호러라는 작품적 성격을 타고나느냐, 타고나지 않느냐의 문제는, 결국 개인이 환경을 이겨낼 만큼 성숙하였는지 아닌지에 달린 것이 아닐까. (때로는 무감각화 없이 지성체의 선의만을 응축해낸 인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리뷰의 주제와 별개의 문제니 생략하고 싶다.)
이 리뷰를 쓰게 된 계기는 내가 브릿G에서 ‘광기의 달’을 무료로 연재하면서, 내가 ‘코스믹 호러’를 좋아하여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아서였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묻혀 있던 생각이, 작품의 완성에 따라 의식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러브크래프트와 나의 성격의 본질이 코즈믹 호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인간이 코즈믹 호러라는 작품적 성격을 타고날 수 있는지에 대해 사소한 의문을 던지고 싶어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러브크래프트는 자의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또는 환경에 의해서든, 자기 자아에 대한 자신감에 제약을 높은 빈도로 걸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주변 환경이 갑자기 완전히 기울어져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아, 사회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훈련할 기회가 적었으며, 자신에게 그것을 온전히 가르쳐줄 사람이 없는데다 설사 있더라도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두려웠으리라는 작가의 생애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러브크래프트에게 안타까움을 표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 분은 한 장르를 부흥시킨 거장이고, 나는 미숙한 작가다. 나의 작법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지만, 세세한 자료 수집과 내면 분석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내나, 그렇다고 과학적이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다. 작품 소재를 찾아내는 노력은 가상할지 몰라도, 통속적인 소설에 특화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 코즈믹 호러 작품의 원고를 이미 완성하여 조금씩 연재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작품성을 갖추었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설사 갖추더라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애송이 작가의 것이다.
그저 내가 인간으로서도, 작가로서도, 성숙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