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은원]의 ‘협’은 무엇일까 의뢰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은원(恩怨) (작가: 엄성용, 작품정보)
리뷰어: 한정우기, 18년 3월, 조회 1553

본 글은 작품 [은원] 외에도 무협 자체에 대해 논해본 종합형 리뷰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처음으로 받은 리뷰 의뢰라 고민이 많네요. 엄성용님이 의뢰를 해주실 때 ‘문화적 감성’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래서 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서 써보겠습니다. 작가님이 쓰신 [은원]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무협에 대해 전반적으로 논하는 거라, 분량이 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주의사항: 전 무협소설의 애독자가 아닙니다. 그저 중화권 문화에 매우 심취한 전공학도 일 뿐입니다. (심지어 전공도 중국희곡입니다.) 저는 한국무협소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중화권 무협 콘텐츠도 소설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더 많이 보았습니다.

 

 

무협소설의 경우 다른 장르소설보다 계보가 뚜렷하고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분야라고 알고 있습니다. 엄청난 덕력을 자랑하는 덕후들이 많은 분야지요. (심지어 학계에서도 김용의 소설을 연구하는 학파가 따로 있습니다.) 가끔 작가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면 무협을 써보고 싶다는 글에는 항상 이 코멘트가 달리더군요. 독자들에게 익숙한 설정에서 벗어났다가는 바로 비판을 하는 곳이라고. 다른 장르소설과 다르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세계관과 설정이 존재하는 것 같더군요. 무협소설은 두터운 마니아가 형성된 층임에도 막상 읽을 만한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소위 정통무협으로 분류되는 작품이요. 무협소설이 우세인 플랫폼인 문피아에서도 현대판타지가 강세니까요.

무협의 근원지였던 중화권에서도 요즘 정통 무협소설 찾기가 힘듭니다. 김용 작품을 재탕, 삼탕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지요. 요즘 중화권에서 유행하는 건 선협(仙俠)입니다.(선협물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유명 웹소설 플랫폼인 치디엔(起點)에 가보면 선협 카테고리에 속하는 텍스트가 무협 카테고리에 속하는 텍스트의 7배에 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화천골]과 [삼생삼세십리도화]도 모두 선협물에 속하지요. 선협은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협의를 행하는 인물들을 다룬 장르입니다.

그래서인지 [은원]이 더 반갑게 느껴지더군요.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정통무협이 떠올랐거든요. [은원]은 기존의 ‘협’을 일부 계승한다는 점에서 정통무협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反 ‘협’으로 읽히는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김용 소설 외에는 무협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던 저에게 좀 생소한 무협 세계였지요. 일단은 무협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 해볼까요?

 

제가 읽은 무협소설이라고는 김용의 작품 밖에 없지만 그래도 무협 영화나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았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했던 70-80년대 무협영화도 다 보았지요. 어머니가 무협영화를 좋아하셨거든요. 비디오 대여점에서 안 본 무협영화가 없었습니다. 오덕까지는 아니어도 이덕이나 삼덕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착각은 학부 2학년 때 와장창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협의 문화적 의의’라는 수업이 개설 되었거든요. 듣기 싫다는 친구도 꼬드겨 함께 수강신청을 했지요. 무협소설은커녕 무협 영화도 본 적 없는 애들이 태반인지라 좋은 성적을 얻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사실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교양 수업을 개설하는 대신 타과의 전공수업을 교양처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무협 수업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에 정말 전교에 있는 덕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대다수가 고학번이었지요. (90년대 후반 학번이 많았습니다) 막상 전공생인 중문과 학생들은 별로 없었어요.

그때 강의를 했던 강사분은 당시 타 학교에서 중국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여자분이었습니다. 앞자리에 포진한 수강생들이(다 남자였습니다) 강의 첫날에 대놓고 덕력을 시험하더군요. 나이도 젊고 여자분이라서 덕력을 의심했나봐요. 전공생이었던 저와 지인들은 강사분과 고학번 덕후들이 나눈 대화를 정말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 무협소설의 계보에 관해 논했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강사분의 압승이었습니다. 모두들 혀를 내두르더군요. 그 수업이 끝난 뒤 중문과 학생들은 다 드랍을 했습니다. 이때 알게 되었지요. 아, 여기는 진짜 엄청난 덕력이 존재하는 곳이구나라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라고. 물론 저는 오기로 버티며 계속 수강을 고집했습니다. (그 결과 C+을 받았습니다……..)

여담이지만, ‘무협의 문화적 의의’라는 수업은 그때 이후로 다시는 개설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전공생들이 학과 교수님들에게 항의를 했거든요. 무협의 ‘문화적 의의’를 배우는 게 아니라 무협소설을 배우고 있으니 원래 취지에 맞지 않는다구요. 무협(武俠)소설은 비교적 근대에 나타난 장르지요. 20세기 초반부터 생겨났으니 중국문학에서는 현대문학(5.4운동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시기에 탄생한 장르입니다. 문헌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중국문학에 있어서는 신생아나 다름없는 나이지요.

* 무협소설의 계보와 특징에 관해서는 [무협 작가를 위한 무림세계 구축교전]이란 책을 추천합니다. 몇 달 전에 출간된 책입니다. 너무 예전에 들은 수업이라 내용이 잘 기억 나지 않아서, 리뷰 작성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알게 된 책인데 수업 때 배웠던 내용이 얼추 다 들어가 있더군요.

 

하지만 무협은 다릅니다. 거의 사마천의 [사기]까지 올라가지요. 그 뒤로도 당나라의 전기(傳奇)-특히 [규염객전]-, 원명청시기의 장회소설-[수호지] 같은 거요-에 이르기까지 계보가 쭉 이어집니다. 대다수의 작품들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데다가, 중국문화의 기저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강의명만을 보았을 때, 원래 그 수업은 무협소설이 아닌 무협에 포커스를 맞춰야하는 수업이었습니다. (물론 수업 초반에는 ‘협’을 기반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리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사실상 무협소설이 아니라 무협 그 자체입니다.

 

무협(武俠)에서 무는 수단이고 협은 목적이지요. 협을 이루기 위해 무가 있는 것이지 협이 없는 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무협소설 내에서도 변주는 있지요. 김용의 [녹정기]의 경우, 주인공 위소보는 무도 없고 협도 없는 인물입니다. 기존의 작품과 워낙 달라, 연재 당시에 김용 작품이 맞냐고 묻는 문의가 엄청 많았다합니다.) 무협소설 수업은 아니지만 ‘중국서사학’이라는 수업도 있었는데 그 수업도 무협(정확히는 협의소설)을 다뤘거든요? 무협소설이 나타나기 전인 명청 시기까지요. 근데 작품 분석에 앞서 진행된 이론 수업은 죄다 정의에 관련된 내용을 다뤘습니다. 롤스의 [정의론]이라던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던지. 그만큼 ‘협’에 포커스를 맞춰 보는 거지요.

시진핑의 무한독재가 가능해진 지금 시기에 아마 상당수의 한국 분들은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중국의 천하개념은 민심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민심을 얻지 못한 천자는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습니다. 나랏님이 치세를 잘못하면 간언을 하고 여러 번 간언을 했는데도 바뀌지 않으면 나랏님을 바꾸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맹자의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네요ㅠ) 약자를 탄압하는, 민의(民意)를 거스르는 강자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인식합니다. 그런 강자는 당연히 몰아내야하는 존재인 거죠.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협’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의협심은 약자를 도와 불의(不義)한 강자를 무찌르는 정의감을 나타내는 말이죠. ‘협’이 있어야만 천하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무협소설에서 그려지는 ‘무’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판타지라면, ‘협’은 현실에 뿌리를 내린 판타지(욕망)입니다. 훨씬 더 현실적인 욕망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무협 속 세상처럼 약육강식의 세상이고 약자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강자를 이겨낼 수가 없으니까요. ‘협’이 튼튼할수록 무협소설이 빛을 발합니다. 무협소설이 특정 역사 시기를 배경으로 깔거나, 인정의 묘사를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야 캐릭터가 더 실감이 나고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들의 ‘협’에 더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협’ 없이 ‘무’만 강조된 판타지는 구무협의 안티테제인 ‘신무협’에 해당될 텐데, 저는 읽어본 적이 없지만 90년대 이후에는 거의 끝이 난 것 같더군요. (먼치킨 무협과 양판소는 논외하겠습니다.) 이전의 무협이 의협심을 지닌 영웅을 갈망하는 민초들의 욕망이 반영되었다면, 오늘날의 유행하는 무협소설은 독자가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주인공의 자아실현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장르가 되지 않았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은원]은 ‘무협’ 중 ‘무’의 매력이 잘 살아있는 글입니다. 저는 무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지만 [은원]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무술 동작이 그려지더군요. 죽은 시체를 보고 살인범의 무공을 파악해 그 범인을 찾아내는 것도 흥미진진합니다. 무협 소설에서는 무공 초식이 독자의 읽는 재미를 더하지요. [은원]에서 나오는 ‘삼중진창법’이나 ‘홍렬십삼초’가 그러하지요. ‘삼중진창법’의 경우 이름 자체에 무공의 특징이 잘 드러나서 좋았습니다. 초식을 구사할 때의 묘사도 좋았구요. ‘홍렬십삼초’의 13초는 무엇이 있는지, 상세 초식과 묘사가 함께 어우러진다면 더 매력적일 것 같네요.

반면 [은원]의 ‘협’은 기존의 ‘협’과 좀 다릅니다. (작품 자체에 ‘협’이 드러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주요 인물인 일섬을 협객으로 보기에는 좀 망설여지네요. 이 글이 장편이라면 확실히 드러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은원]에서는 사파에 속하는 살인청부업자인 ‘일섬’이 ‘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왜 자신의 아비의 사지를 찢어 죽였냐는 ‘나’의 질문에 일섬이 답하지요. “그건, 네 아비가 강호를 등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호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은원]의 ‘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원]에서 나타나는 ‘강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호(江湖)는 허구적 공간이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무협소설에서 강호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세계이고 후자는 또 다른 현실이 되어버린 세계지요.

전자의 경우, [사조영웅전]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보통 남송이나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글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라고 생각되네요. 이민족이라는 강력한 적의 등장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직길이 막히고 힘든 삶을 살게 되었지요. 관직에 나가 입신양명을 하는 기존의 자아실현 방법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설사 가능하더라도 명예롭다고 볼 수는 없겠죠. (실제 이 시기에는 창작 작품이 엄청 많이 쏟아졌습니다. 문인=관료라는 공식이 깨졌기 때문에 관직에 나서지 못한 문인들이 자신의 자아실현 혹은 생계를 위해 글을 엄청 많이 썼거든요.)

현실에는 무만 있을 뿐 협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민족은 무를 통해 한족을 탄압하고 나라를 위협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강호는 다릅니다. 그곳은 대의명분을 따르며 협에 중점을 두는 곳이니까요. 이 경우, 강한 결핍을 지닌 당시 역사와 맞물려 나타난 강호는 판타지를 채우는 공간이 되겠지요. 속세에서 벗어난 이상향이 될 수도 있구요. (물론 강호에도 나쁜 놈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경우, 현실(금나라나 원나라 같은 적국의 조정)에서 입신양명한 인물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후자의 경우, ‘강호’는 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이 강호에 있으니 그 몸이 제 것이 아니다(人在江湖,身不由己)”라는 말에 나타난 강호는 바로 여기에 속하겠네요. [은원]에서 나타나는 강호도 여기에 속하지요. 정파와 사파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정파가 또 다른 권력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거니까요. 홍진(紅塵)에서 벗어난 강호는 또 다른 속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현실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때문에 “그건, 네 아비가 강호를 등졌기 때문이다.”라는 일섬의 대답은 ‘나’의 아비가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했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강호를 떠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세상을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은원의 실타래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강호’라는 허구적 세계든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든, 다른 사람과 은원을 맺지 않고 살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요! 강호는 허구적 세계이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적 세계죠. 무협 소설  속에 드러난 이치와 무협 세계 속 인물군상은 현실 사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것들입니다.)

 

결국 그들의 은원은 피를 불렀습니다. 어미가 지아비를 죽이고 아들이 어미를 죽였지요. 이들의 은원을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죽음뿐이죠. 결국에는 은원의 끈, 그 끄트머리(죽음)에서 모두들 만나게 될 겁니다. 약간은 허무주의적인 결말이죠. 제가 하드보일드 문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달걀을 너무 잘 익혀서 목이 메이는, 하드보일드가 떠오르는 냉소적인 글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지닌 냉소적인 특징 때문에 [은원]은 反 ‘협’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속세(강호)의 이중적인 면을 비판하는 시각 때문에 ‘협’을 다룬 텍스트로 읽히기도 하구요. 무협소설을 ‘협’에 맞춰 쓸 것인지 反 ‘협’에 맞춰 쓸 것인지는 사실상 작가의 자유지요. 하지만 장르소설은 독자가 기대하는 게 분명한 소설입니다. 무협소설도 마찬가지지요. 무협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협’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기에 反 ‘협’에 맞춰 글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글을 읽는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지지요.

 

[은원]이 개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인물들의 전사(前史)와 그들의 목소리가 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의뢰인은 왜 일섬에게 의뢰를 하였는가, 그들은 왜 의뢰 후 직접 살인을 하였는가. 이 두 가지는 작품의 초반에서부터 단화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 부분입니다. 독자의 호기심을 끄는 부분이죠. 단화의 외침을 통해 그 의문이 해소가 되구요. 자신을 버리고 남자를 따라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 이 기회를 통해 사파인 일섬을 쳐내려고 하는 음모 등이죠. ‘나’의 아비인 단화의 남편이 왜 그녀를 버리고 떠났는지도 언급이 되지요. 캐릭터들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상황을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상황을 가늠하는 것과 독자가 캐릭터를 이해하고 이에 공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협소설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김용의 소설도, 사실 제가 읽기에는 불편한 지점이 많았습니다. 매력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장무기가 왜 옴므 파탈처럼 여심을 거머쥐는지, (제가 보기에는 옴므 파탈이 아니라 그냥 파탈로만 보였습니다..) [의천도룡기] 속 여성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읽기가 좀 힘들었고 모든 여자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은 장무기가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마지막에는 조민을 선택하는 것도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애정라인은 결국 누구에게도 진심이 아닌 것처럼 보이죠) 소위 여성향이라고 분류되는 로맨스 소설에서는 절대 쓰지 않을 설정입니다.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혼인을 하는 것도 절대 공감할 수 없는-[녹정기]의 위소보- 설정이지요. 남성들에게는 판타지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성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판타지입니다.

대중문화에서 여성이라는 타겟이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지금, 무협물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건 이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은 그렇다 쳐도 더 대중적인 2차 창작물로는 무리가 있지요. (2차 창작물로 만들어지는 일부 정통 무협 소설도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각색이 많이 이루어지죠) 반면 요즘 유행하는 선협물의 경우 로맨스는 필수입니다. 특히 2차 창작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말이 선협물이지 선협의 탈을 뒤집어 쓴 로맨스죠..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너무 평면적이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악역은요. 이건 제 개인적 취향이지만, 저는 모든 캐릭터가 자신의 목소리(혹은 사연)를 가지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악역도 인간으로서 이해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제외합니다.) [사조영웅전]의 매초풍이나 [신조협려]의 이막추가 지닌 감정과 사연은 (개인적으로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독자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협 소설에서는 보통 그 동기가 사랑입니다. (여성은 ‘협’보다는 ‘정’에 치중한다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기에 조심해야하는 부분이지만요. 반면 영화 [와호장룡]의 경우 여성 캐릭터의 욕망을 입체적으로 잘 드러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무협영화입니다.) 몇 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 [신조협려]의 경우, 소용녀 미스캐스팅 논란이 있긴 했지만 이막추의 경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막추가 왜 사랑에 분노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드라마 초반에 그 사연을 잘 살려줬거든요.

[은원]의 단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원]에서 엉켜있는 실타래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단화의 ‘정’입니다. 정확히는 ‘애증’이겠지요. 사랑은 단화의 가장 큰 내적 동기이자 가장 큰 좌절을 안겨준 감정입니다. 어미가 지아비를 왜 죽이게 되었는지에 관한 충분한 설명 없다면 독자가 공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자신을 버리고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라는 말 한마디로는 왜 단화가 전 남편을 찾아내 죽이고 식솔까지 도륙하였는지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천공과 개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단화의 아들인 ‘나’의 사지를 잘랐다는 부분은 쉽사리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나’는 단화의 아들이자 천공의 증손주입니다. 중화권은 천륜지락(天倫之樂)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골육상잔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황실이면 모를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들의 행위에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51매에 불과한 단편 분량으로는 인물들의 사연을 잘 드러내기가 힘들지요.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무협’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량을 늘려 이들의 목소리를 잘 살리거나 아예 장편으로 구상해 이들의 사연을 그려내는 건 어떠신가요? 그럼 너무 좋을 것 같네요. (결코 저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닙니다….ㅋㅋㅋ 사실 맞아요, 작가님의 무협물을 계속 읽고 싶습니다. 계속 써주세요 ㅋㅋㅋ)

 

만약 시대적 배경이 불투명한 우언(寓言)적인 무협을 지향하시는 게 아니라면, [은원]의 배경에 어울리는 시기는 명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의 많은 무협 소설들도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지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명나라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송나라가 무(武)를 얕잡아보고 문(文)을 숭상해 외세의 침략 때문에 멸망에 이르렀다면, 명나라의 경우 황제의 태업(특히 만력제), 환관정치로 인한 내부적인 몰락이 주된 요인이었지요.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내부가 단결하기 마련이지만, 내부의 적은 다릅니다. 더 큰 혼란을 불러오지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진리처럼 여기던 가치관이 붕괴합니다.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캐릭터인 일섬과 확실히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명나라 중기에 성리학에 반발하는 양명학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는 점도 [은원]의 개연성에 힘을 부여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될 수 있겠죠. 또 자본주의의 발달도 있구요. (명나라를 다룬 역사서 중에 유명한 책이 한 권 있는데 제목이 [쾌락의 혼돈]이에요. 제목부터 명나라의 사회상이 확 드러나지요.) 성리학이 금욕을 추구한다면 양명학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거기에 상업이 성장하면서 사회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동시에 획기적으로 바뀌는 시대죠. 이런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일섬과 같은 인물을 그려낸다면 훨씬 더 촘촘한 스토리가 완성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건 제 개인적 취향일 뿐입니다. 시대적 배경이 분명하지 않은 무협도 매력적인 건 마찬가지니까요. 다만 시대적 배경이 분명한 무협이든 그렇지 않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잘 묘사가 되야하는 건 공통적인 부분이겠지요.

 

[은원] 속 인물인 일섬, 단화, 개문, 천공 그리고 죽은 ‘나’의 아비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은원]을 읽은 독자에게도 [은원]을 읽지 못한 독자에게도 모두 큰 즐거움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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