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몸과 마음이 커질 수록 동화의 의미는 요상해진다. 잔혹, 프로이트, 성적 욕구 등의 수식어가 치덕치덕 붙어지며 끈적한, 동심파괴적인 비린내를 풍기게 된다. 물론 그 생각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마녀를 아궁이 속에 던져 넣은 그레텔의 행동은 소름끼칠 정도로 그 나이에 맞지 않게 치밀하다. 항아리 속에 처박힌 채 젓갈이 되어가는 팥쥐의 모습은 세세하게 상상하면 입맛이 떨어진다. 21세기 최고의 동화인 라이온 킹은 또 어떤가. 악역 사자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버림받아 결국 쥐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동화가 가진 측면은 천진난만함으로 인한 폭력성만 있지 않다. 동화는 아름답다. 어린왕자는 사랑의 부족으로 말라가는 장미를 찾아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미가엘은 신의 은총과 은혜를 만끽하며 하늘로 돌아간다. 바보 이반은 결국 악마의 방해를 바보스럽게 이겨낸다.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천국으로 올라간다. 물론 결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거나 불확실한 요소와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렇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의 마음들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뉴스 기사를 돌아다니면서 바보이반과 어린 왕자를 찾는다.
조금이라도 더 그 이미지와 비슷한 세상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현실에 이미래가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있어도 금방 민식 선배가 되고 만다. 만약 이미래가 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이미지는 침전되고 흐릿해지며, 또 다른 김의원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될 수도 있다. 이미래가 김 의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 소설 속 이미래가 자신의 생각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희망으로 승화하여 초월적인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판타지이고, 동화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소설은 싱그럽고 예쁘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의 미소와 눈물은 수시로 상처를 주는 일상과 거역할 수 없는 불의에 억눌러질 때마다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한다. 비록 초월적인 힘은 없다고 해도, 우리에게 데이지 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