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 읽은 지금에 와선 이미 3주나 지났네요. 읽는 데 시간이 걸린 이유는 어디까지나 작품외적인 이유였어요. 개인적으로 글을 가까이 하기 힘든 시기도 자주 있었고, 무엇보다 역시 웹에서 장편을 읽는 건 쉽지 않네요. 특히 스크롤하면서 읽는 게. 스크롤하다가 다음화 누르고 또 스크롤 하다가 다음편 누르고.. 얼른 브릿G앱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네, 이 말을 하기 위해 글머리에서 잠시 여담을 했습니다.
저는 로맨스 장르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소설이야 편식의 끝판왕이니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서도 전 로맨스라면 일단 고개부터 흔듭니다. 로맨스에 취향에 가까운 무언가가 추가된다면 관심이 조금 생겨요. 음악이 좋다든가, 음모와 미스테리가 넘친다든가, 영상이 끝내준다든가. 제게 로맨스는 그런 것들을 위한 배경이 되어버리는 거죠.
‘묵호의 꽃’은 로맨스 판타지, 라고 합니다. 판타지는 또 뭔가. 저는 얼마전까지 판타지는 중세 시대의 기술을 가진 사회에 용과 마법사가 나오는 거라는 깊은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었어요. 나중에야 이 ‘판타지’는 그 ‘판타지’와 다르다는 걸 알았죠. 아 물론 그 ‘판타지’도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니었지만.
게다가 리뷰를 슬쩍 읽어보니 무협이라는 단어까지 나와요. 무협은.. 뭔가. 전 무협지는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고 알고 있는 작품도 없어요. 아는 건 동양 무술과 관련있다는 것 정도..?
어쨌거나, 이렇게 ‘묵호의 꽃’은 제게 낯선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는 먼저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 퍼진 ‘솔이 피버’ 때문이었어요. 모든 독자들에게 솔이열(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지나가며 빼꼼거리던 제게는 굉장해 보였죠.
그래서 읽기 시작했고, 솔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알게 되었어요. 문장만으로 이렇게 생동감 넘치고 눈에 보일 듯 선명한 인물이 그려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특히 질 거 같을 때일수록 더 강력해지는 말빨. 모든 서술을 다 지우고 대화문만 남겨 놓고, 솔의 말만 읽어도 재밌을 거 같을 정도였어요.
솔이 다른 생물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설정에서 판타지에 익숙하지 못한 저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금방 익숙해졌어요. 이런 능력이 단순히 따분한 전개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솔이 사건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도 좋았어요 (가끔 있잖아요. 주인공의 능력이 MP3가 달린 믹서기로 토끼를 사라지게 하는 거라고 해도 이야기 전개에 별 문제가 없는 이야기들). 별도의 설명은 없었지만, 이야기의 막바지에서 솔과 최후의 흑막이 대화를 나누며 ‘사방에서 넘치는 비명’에 대해 언급할 때, 저는 이게 그 두 사람의 성격을 가른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솔의 극단적으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긍정적이고 때론 무모할 만큼 적극적이기까지한 성격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그 비명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그를 최후의 모습으로 이끌었겠죠. 아마도.
캐릭터 설정이 전형적이라는 말도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 전 로맨스에 대한 배경이 없어요. 천연색 여주와 하얀 남주 그리고 검은 남주, 이게 얼마나 전형적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도리어 신선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다음에 또 로맨스를 읽고 거기에 이런 관계가 나온다면 전 그게 전형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묵호의 꽃’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 같아요.
이야기 속에서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는 음모도 좋았어요. 전 음모와 배신을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그게 마을 하나 가문 하나 먹고 뱉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를 흔드는 수준이었다는 것도. 흑막으로 태어났으면 나라 뒤집는 것 정도는 꿈꿔야 악역답죠. 나라가 흔들릴 뻔했는데 그 뒷수습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조금 붕 떠버린 느낌은 있었지만, 후일담에서 살짝 언급만 해줘도 충분한 거니 별 문제는 아닐 거 같아요.
이 흑막에 대해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어요. 악역으로서의 매력이 적었던 거 같아요. 나쁜 새X라는 걸 알면서도, 이 악역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묘한 죄책감 같은 게 없었거든요. 물론 로맨스는 해피엔딩이 기본이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그의 계획이 결코 성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해피엔딩이 분명한 이야기 속에서 마지막 갈등을 키우는 건 이야기 속의 승패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숨어있던 악역의 승리에 대한 기묘한 기대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이건 아마 장르에 대한 취향의 문제이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주인공 솔과 운명의 시작점이 같다는 점에서 솔과의 감정적 교차도 더 많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악역에 대한 이해와 매력이 더 커지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문득 남았어요.
최종회까지 읽고 나서 가장 마음에 남는 인물은 주인공 3인방이 아니라 시호였어요.
사실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선 주인공 세 사람, 특히 운명을 묶기로 한 두 사람의 후일에 대해선 관심이 별로 생기지 않았어요. 로맨스에서 해피엔딩에 도착했으니, 그들의 할 일은 다 끝났으니까요. 알아서 알콩달콩 잘 살겠지, 하는 생각만 남았죠. 그걸로 충분했고, 그래야 하니까 (뜬금없지만 ‘바람의 검심 성상편’이 문제인 이유는 바로 이것!)
하지만 시호는 지금부터가 진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는 그저 시호라는 캐릭터를 단련시키기 위한 전일담이었고.
저는 이야기 속에서 시호가 가장 인간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좋았고. 사실 솔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잘 다듬어진’ 느낌도 있어요. 솔은 누가봐도 아리땁고 귀여운데다, 실수를 해도 이게 또 매력적이고, 위기에 처해도 운이 좋거나 어떻게든 잘 대처를 해요. 픽션이기에 존재할 수 있는, 작가의 애정과 정성이 등장할 때마다 느껴지는 캐릭터죠.
반면 시호는 외모에서 솔에게 진다는 게 대놓고 드러나고, 성격 또한 그리 좋지 않아요. 질투와 시기를 두르고 있죠. 게다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땐 나름의 시커먼 음모까지 진행하고. 시호는 똑똑하지만, 그럼에도 실수를 해요. 게다가 이 실수의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결국 후회와 상처만 남죠.
아무튼 시호는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다른 악역들처럼 사리사욕에 지배되어 희생을 강요하는 사악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욕심과 양심에 휘둘리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에요. 게다가 시호의 그런 행동이 의외라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봤을 때, 솔 때문에 변한 캐릭터는 남주 두 명 뿐만 아니라 시호도 포함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즉, 이야기 속에서 시호 역시 성장하고 있다는 거죠. 솔과는 달리, 그 방향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지만.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시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요. 시호의 세상은 모두 무너졌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시호가 스스로를 포기한 건 아니었어요. 바라보던 것, 욕망하던 것을 잃었다고 자기 자신마저 잃는 건 나약한 인물들이나 하는 짓이죠. 비록 상처 받고 텅빈 마음만이 남았지만, 시호는 이제 더 큰 세상을 바라봅니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다시 그 마음을 보듬고 새로운 목표와 사랑을 그 안에 채우게 되겠죠. 시호의 진짜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거죠 (여기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가 남주의 편지였다는 게 쪼끔 아쉬웠어요. 시호 스스로가 결정했다면 좋았을 거 같아요).
아마 어렵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시호가 새로운 세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요. 그곳에서도 때로는 실패하고 상처받고 넘어지겠지만, 이미 시호는 모든 것을 잃은 경험이 있으니 결코 거기서 멈추지 않겠죠. 분명 흥미진진하고 영감 넘치는 이야기가 될 거라 생각해요. 게다가 ‘묵호의 꽃’과는 전혀 다른 장르가 될 것 같고, 같은 세계관의 다른 장르 만큼 신나는 것도 얼마없죠.
종이책이었다면, 다시 휘리릭 돌아보면서 좀더 자세하게 썼겠지만, 웹에서는 힘드네요. 종이책이 나오면(계약성사 빵빠레) 다시 읽으며 곱씹어 보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