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연에게 시비거는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시간만큼은 인간에게 정복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현대과학에 입각한 판단일 뿐입니다. 먼 미래에는 인간의 정복 리스트에 시간이 추가될지도 모를 일이죠. 사실 시간과 보폭을 맞추기도 급급한 마당에 정복이 무슨 소리겠습니까. 시간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씻는 동안에도, 잠을 자는 동안에도 흘러갑니다.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저희는 잠을 줄여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시간을 아껴 토익 단어를 외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쉼없이 달려가다가 갑자기 시간이 보폭을 늦추는 순간이 찾아오면 이것도 곤란합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열심히 발을 놀려도 제자리 종종걸음이면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습니다. 제멋대로 빨라지고 느려지는 시간의 보폭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삶은 많이 피곤해집니다. 이렇게 시간과 함께 쉼없이 발을 놀리다 보면 삐끗 넘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기억의 공백과 쓰린 공복을 안고 잠에서 깨어난 우리의 주인공처럼 말이죠.
우리의 주인공은 편의점에서 해장라면을 먹다가 묘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열정적인 알바생 김시도 씨의 협조로 인해 자신의 기시감이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당시 야간알바생이었던 영원 씨가 증언해준 덕분입니다. 주인공은 강렬한 쪽팔림에 김시도 씨와의 대화에서 황급히 벗어나려 합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춥니다. 영원 씨의 소행입니다. 영원 씨의 설명에 따르면 김시도 씨는 사실 시간을 훔치는 시간도둑이었습니다. 전날 밤에 이어 주인공의 시간을 다시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시간을 멈춰 현장검거를 성공한 것입니다. 영원 씨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시간도둑의 훔친 시간을 회수한 후 시간을 원상태시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현재였음이 드러나며, 소설이 내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드러납니다. 현재의 시간은 언제나 흘러가기에, 소중한 기억들을 시간에 휩쓸려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의미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사라지는 시간들은 사실 누군가가 훔쳐갔기 때문이라는 발상이 재미있습니다. 시간도둑들의 창고에는 어떤 시간이 있을지, 영원은 어떻게 시간도둑들을 추적하는지, ‘나쁜’ 시간도둑들은 누구일지, 상상할 나래들이 충분하다는 건 그만큼 시리즈화 하기 좋은 소재라는 뜻이겠지요. 설정을 조금 더 다듬어 sf 장편소설로 써주신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도둑 김시도 씨의 행동입니다. 주인공 현재 씨가 시간도둑에게 기시감을 내포하는 질문을 한 상황입니다. 완벽범죄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목격자가 다가와 “그 날 나 이상한 거 봤는데 넌 알아?”라고 물은 셈입니다. 도둑이라면 발뺌을 하거나, 당신이 헛것을 봤음을 강렬하게 어필했겠지요. 그런데 시도 씨는 주인공의 기시감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섭니다. 결국 영원 씨에게 기시감이라는 힌트를 흘려 검거되는 자충수가 됩니다. 심지어 작품 내에서 잡으려는 자의 시간과 기억을 훔쳐버리기 때문에 시간도둑은 잡기 몹시 어렵다는 설정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도 씨는 영원의 정체를 알 수도 있다 해석됩니다. 이 경우라면, 적어도 영원에게만큼은 자신의 흔적을 보이고 싶지 않아야겠지요. 만일 우리의 시도 씨가 보여주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모르겠습니다. 눈먼 경찰을 놀리는 도둑이 된 기분일 테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선 이런 시도 씨의 행동에 충분한 당위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이 아쉬웠습니다.
두 번째는 시점입니다. 계속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마지막에 시점이 조금 흐트러졌습니다. 김시도, 영원, 우리의 주인공 현재 씨. 이 세 등장인물의 이름은 큰 상징성을 지닙니다. 때문에 아래와 같은 연출을 만드신 듯합니…
그녀는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면서, 고개만 돌려서 웃는 얼굴로 현재에게 이야기했다.
(중략)
지금부터 다시 현재의 시간은 흐른다.
…다만, 이 글은 초반부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연출을 더욱 살리고자 했다면 처음부터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 점만 제외한다면, 주인공의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과 작품 내의 설정이 이중적으로 얽히며 작품을 마무리하는 멋진 마무리입니다.
경찰과 도둑은 언제나 즐거운 설정입니다. 거기에 시간이라는 소재가 적절히 흥미롭게 버무려졌습니다. 예쁜 구슬들이 담긴 상자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잘 꿰이기만 하면 훌륭한 목걸이가 탄생할 듯합니다. 슬슬 리뷰를 여기서 마무리하고 저도 시간을 꽉 붙들고 발걸음을 떼어야겠습니다. 시간도둑에게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라도요.
이만 줄입니다. 모쪼록 시간과 함께 즐거운 산책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