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러는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다리 밑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는 탈영병이자 거지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를 보게 된 니르젠베르크 성의 주인, 칼스텐에게 불려가 숙식을 제공받으며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분위기는 처음부터 수상쩍습니다. 일단 성에 들어가는 통로 자체가 하수구입니다. 시종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도 이상하고 반지하의 창으로 내다 보이는 정원에는 의문의 여인이 돌아다닙니다. 거리에는 니르젠베르크 성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구요. 대체 이 성과 그림에 얽힌 비밀이 무얼까, 슐러가 성의 비밀을 파헤칠까 아니면 위험을 피해 도망칠까를 궁금해 하면서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글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림, 특히 안료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슐러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 좋았어요. 이런 디테일들을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맞추는 게 어려운데 안료에 대한 부분은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반면에 성의 구조에 대한 묘사는 많지 않아 상상하기가 좀 어려웠어요. 특히 정원 부분은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동쪽 건물이 일자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원을 지나게 된다.’는 부분을 보면 작가님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구조가 있는 것 같은데 상상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성에 대한 비밀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단서가 주어지기 때문에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 고민하게 되죠. 그 과정은 추리 소설처럼 탄탄한 짜임새가 있다기 보다는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성을 둘러싼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되겠네요.
슐러가 진실에 다가가면서 마녀가 등장합니다. 칼스텐이 슐러를 후원하는 건 그의 그림 실력을 키워 마녀의 부활을 막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서, 슐러로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죠. 과연 칼스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더라도, 슐러가 목숨을 걸 가치가 있을까요. 차라리 거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나은 선택이 아닐까요. 아니면 성의 비밀에 더 깊숙히 뛰어들어 진실을 밝혀내야 할까요.
왜 슐러여야 할까요. 슐러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배우며 마녀를 막을 그림을 완성할 실력을 갖춰가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상하게도 슐러는 마녀의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 주변의 사람들은 이상한 꿈을 꿉니다. 모두가 똑같이 마녀와 관련된 꿈을 꾸고, 이상한 병에 시달리게 되죠. 슐러도 꿈을 꾸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녀의 마법에 내성이 있는 거죠.
슐러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어둠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녀라는 존재 자체에 겁을 먹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천진난만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댑니다. 왜 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지, 왜 마녀라고 해서 무조건 겁먹고 도망쳐야 하는지를요. 처음에는 이런 슐러의 태도가 중세적이고 무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작품의 분위기와 겉도는 듯하여 약간 거슬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라는 걸 이해하고 난 뒤에는 오히려 그런 부분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칼스텐은 항상 점잖은 후원자의 모습이지만 독자로서는 끝까지 의심을 거두기 힘들죠. 게다가 슐러는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입니다. 그런 슐러가 성주의 부탁에, 사제의 권위에, 마녀의 금기에 따르지 않는다면 대체 뭘 믿고 살아가야 할까요. 당장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마녀를 막을 그림을 그리는 일입니다. 그 말을 믿고 따라야 할까요. 그건 마녀의 부활을 막는 일일까요, 혹시 마녀를 부활시키는데 일조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런 상황에서 슐러가 기대는 건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냉철한 추리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녀와 사제에 대한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보는 슐러의 눈에는 어쩌면 가장 명쾌하게 진실이 보입니다. 그는 결국 누구를 믿어야 할 지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마녀와 사제가 상징하는 중세를 극복해 낸 건 사람에 근본을 두는 인본주의죠. 이 인본주의의 기반에는 냉철한 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전부였다면 글도 읽지 못하는 슐러는 마녀와 사제를 이기지 못했겠죠. 비록 이성에 기반하지 않아도 슐러에게는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보는 힘이 있었습니다. 슐러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다리 밑의 거지들과 시종, 스승, 성주, 사제, 심지어는 마녀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합니다. 권력과 지위, 힘에 움츠러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로 밀어버리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는 그런 생각이 마녀와 사제를 극복해내는 또 하나의 힘이었다는 걸 슐러는 보여줍니다.
슐러가 벌인 싸움이 미신과 계몽의 대결, 신앙과 이성의 대결이 아니었다는 걸 상징하는 것이 칼스텐이라고 생각해요. 마녀의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슐러처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제 역시 보호를 받고 있지만 깊은 지하, 영원한 겨울에서 그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썩어가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불신과 과학에 짓눌려 오히려 근본주의로 도피해 버리는 신앙처럼요. 하지만 칼스텐은 성 안에서 진실한 신앙을 지키면서도 마녀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의 뒤에 천사가 있기 때문이죠. 마녀와 대항하기 위해 가난한 화가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하면서도 칼스텐은 그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근본을 둘 수 있다는 걸 칼스텐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해요. 슐러가 꾸는 꿈을 처음 봤을 때는 무척 혼란스러웠어요.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일단 지나갔다가 나중에 다시 읽었습니다. 이유 중 하나는 사람 이름이 많이 등장해서였는데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게 슐러의 과거 기억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아니더라구요. 그냥 대명사로 처리했어도 될텐데 왜 굳이 많은 이름들을 썼을까 싶었는데, 그게 결국 다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카, 란돌프, 로즈, 센시아, 오들러… 마녀의 마법에 희생된 그들도 모두 저마다의 이름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니까요.
글을 과도하게 해석하려고 하는 게 제 읽는 습관인데요. 써 놓고 보니 혹시 제 글 때문에 이 이야기가 상징이 뒤섞인 어려운 소설이라는 인상을 줄까 걱정이 됩니다. 마녀와 신비로운 성, 천재 화가와 그림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푹 빠져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에요. 리체르카님 글을 읽다보면 뜬금없이 주인공이 귀엽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요. 슐러도 아주 사랑스러운 주인공입니다. 모두들 슐러와 함께 비밀이 가득한 성으로 모험을 떠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