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 낯익은 제목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철우 작가의 중편, ‘붉은 방’ 입니다. 고문 하는 자와 고문 받는 자의 내면을 오고가며 전개되는 그 소설에서 ‘붉은 방’은 고문실을 의미했었죠. 뒤이어 떠오르는 것은 같은 제목을 가진 일본의 B급 영화인데, 원제는 ‘붉은 밀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붉은 방’으로 통용되었었죠. ‘임금님 게임’을 기반으로 폭력과 고문이 마구 자행되는 가학성 짙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붉은 방’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공간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작전명이거든요.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작전명입니다.
네, ‘붉은 방’은 전염병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전염성이 강하고 감염되면 아무런 증상 없이 얼마 후 바로 사망에 이르기에 더욱 공포스런 병입니다. 그런데 작전명이 어째서 ‘붉은 방’인가? 아마도 그것은 이 전염병이 주로 폐를 감염시키고 발병하면 폐병처럼 붉은 피를 쏟아내며 죽기 때문에 그렇게 피칠갑을 시킨다는 의미로 붙여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하튼 주인공은 이제 막 외과 전문의가 된 혜주라는 젊은 여성입니다. 그녀는 이제 막 폐암 환자 수술에 성공하며 마음이 한껏 고양되어 있습니다. 비단 첫 수술에 성공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가진 슬픈 사연 때문입니다. 그녀에겐 폐암으로 죽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는 꼭 의사가 되어 더 이상 폐암으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의사가 되었고 이번의 수술 성공으로 그런 꿈에 성큼 다가간 것 같아 행복한 기분이 된 것입니다. 그런 혜주에게 밀양에서 살았던 시절, 내내 친한 친구였던 석진규에게서 물건 하나가 배달됩니다. 석진규는 혜주와 함께 폐암을 막기로 다짐한 친구인데, 혜주처럼 자신 이제 그것을 이뤄줄 수 있는 드링크제 하나를 개발했다면서 보내온 것입니다. 이름은 ‘동충하초’
혜주가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막 드링크를 마신 순간, 평소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과장에게서 호출이 옵니다. 그것이 바로 강원도 곡성에서 발생한 정체 불명의 전염병과 마주하게 되는 첫 시작이었죠. 정부에서 국민의 패닉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발병지로 가서 전염병을 연구할 자원자를 찾는다고 하자 과장이 망설이지 않고 응합니다. 혜주가 늘 그림자처럼 따르고 싶었던 과장이 그렇게 자원하자 혜주도 선뜻 손을 듭니다. 물론 정부가 약속한 사태 수습 후에 자신에게 주어질 막대한 보상도 기대하면서…
그렇게 과장과 혜주 그리고 보건관리자와 부검의, 이렇게 네 명이 ‘붉은 방’ 작전에 투입됩니다. 그들은 군인의 인도로 전염병으로 격리된 지역으로 가는데 첫 날부터 그들은 자신의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건 무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의 작전을 진두지휘 하고 있는 최고 책임자, 대대장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군인정신이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전염병의 원인이나 백신 개발 보다 전염병 확산을 저지하고 근절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즉각 소각, 수시 소독’
전염병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원칙대로라면 먼저 파견된 팀이 부검과 조직 검사를 통해 전염병 원인과 특징, 감염 경로 같은 것을 연구, 규명해야 하지만 이 대대장에게 그런 건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시신은 무조건 소각입니다. 신체 조직 하나 가져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검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병의 징후가 나타나면 무작정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하얀 연기를 뿜어 소독시킵니다. 발병한 사람이 제 때 치료 받지 못하여 죽거나 말거나. 과장과 혜주가 열심히 설득하고 세게 항변도 하지만 대대장에게 타협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행동으로 많은 부하의 목숨을 지켰다면서 당당합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그래도 과장과 혜주는 조직을 몰래 훔치기까지 하면서 전염병의 정체를 규명해 나갑니다. 그러다 과장을 시작으로 팀원이 하나 둘 전염병으로 죽어갑니다. 팀 중 최후의 1인이 되는 혜주는 과연 전염병의 정체를 밝히고 치료제까지 찾을 수 있을까요? 혹시 먼저 온 1차 팀처럼 전멸하는 것은 아닐까요?
원래 전염병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내내 긴장감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주인공이 언제 감염되거나 또 그것으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이 소설도 그런 긴장을 잘 유지해 나갑니다. 거기엔 대대장과의 갈등까지 거들고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결말도 나름 깔끔합니다. 매조지가 잘 되어있습니다. 전염병 원인의 아이디어도 괜찮구요. 드라마 ‘허준’의 설정을 하나 빌려와 혜주의 고향까지 ‘밀양’으로 설정하면서 혜주의 진정한 의사로서의 성장을 살려낸 것 역시 좋았습니다.
그런데 분량의 한계 때문일까요? 드라마가 많이 부족합니다. 갈등 양상이 대대장 하나밖에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아무리 군대이고 이런 상황에 항명은 곧 처형인 것을 감안해도 부대 내 상황이나 격리된 지역 내 상황이 너무 조용한 게 좀 의아합니다. 달아나려는 병사나 저항하는 마을 사람이 과연 그렇게 없을까 싶습니다. 과장이 죽는 장면도 갑자기 문장으로 소개하는 것 보다 좀 극적으로 구성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팀원을 비롯하여 사람들의 죽음이 현장 묘사 없이 문장으로만 보고하듯 알려지기에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아주 극한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분위기 자체는 왠지 차분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염병의 공포가 잘 전해지지 않고 때문에 긴박감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그저 저 개인만의 느낌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앞서 아쉬움 운운 한 것은 그런 것을 살렸다면 더 근사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마음으로 토로한 것일 뿐이죠. 마지막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즌 2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데, 그 때는 용광로처럼 뜨겁고 훨씬 더 다이내믹한 사건으로 ‘전염병이 만들어내는 극한 상황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을 가감없이 보여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