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사실 이 작품의 서사 그 자체는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도중에 너무 곁가지를 뻗어서 장르가 바뀔뻔 할 정도니까. 도중까지 이 작품이 미스터리 스릴러인 줄 알았다. “내 여자친구가 직장에서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내색도 안 하고, 며칠 동안 연락도 안 되고.” 나는 이 여자친구가 암살의 마스터라는 결론으로 끝나도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실제 내용은 그와 많이 다르다. 그리고 만년필을 오래 사용해온 사람으로서 이 작품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거 같다.
이 작품에서 여자친구는 만년필 사용자다. 그것도 플런저 필러 방식의 만년필이다. 플런저 필러는 만년필 잉크셀프필링 방식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의 잉크를 채울 수 있는 방식이다. 아니, 모든 잉크필링 방식 중에서 가장 많은 잉크를 채울 수 있다. 그렇지만 부품이 복잡하고 수리하기 어려우며 클래식 만년필은 부품 조달하는 것도 큰 일인데다가 살짝만 잘못 다뤄도 내부 진공이 만들어지지 않아 잉크가 덜 차기까지 한다. 여러모로 귀찮은 데가 많은 방식이라 요즘에는 플런저 필러보다는 잉크가 덜 들어가지만 상술한 모든 단점이 보완된 ‘피스톤 필러’가 많이 사용된다.
남자친구가 ‘피스톤?’하고 물을 때 ‘플런저!’하고 답할 정도로 플렌저 필러를 좋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년필은 태생이 필기구라서, 뭐라도 써내려가는 것이 만년필의 본분이다. 그리고 재충전 없이 많이 쓰기 위해서는 한 번에 많이 채워넣어야 한다. 잉크를 많이 충전할 수 있는 만년필일 수록 재충전 없이 오래 쓸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은유라고 보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결혼하고 나면 정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은 상대라는 잉크를 한 번에 많이 채워넣어야 하는 플런저 필러와 같다. 잉크가 다 떨어지기 전에 결혼하면 정으로 살아야 하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해어지는 거고, 배럴이 무지막지하게 커서 잉크가 엥간이 한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잉크는 채우는 것만큼이나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비우고나서 바로 채워서는 곤란하다. 배럴에 잔여 잉크가 새로운 잉크와 섞이면 내가 원하는 색을 내지 못한다. 잉크를 다 쓰고 나면 만년필을 분해해서 깨끗하게 청소해주어야 한다. 뜨거운 물을 사용하면 곤란하다. 만년필 부품이 열에 의해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은 만나기 전에 이전의 추억은 어느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너무 과격하게 추억을 삭제하려 들면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깨끗하게 청소해내야 한다. 지난 사람은 떠나보내야 새로운 사람을 그 사람 그대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잉크가 떨어지기도 전에 무조건 2주에 한 번은 잉크를 채워넣는다.
이것은 어쩌면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또한 작품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2주에 한 번씩 잉크를 충전하는 습관을 들였다고 한다. 같은 종류의 잉크를 충전하는 거라도 만년필은 청소해주어야 하는데, 잉크의 찌꺼기가 피드에 남아 잉크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