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 모두…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자기에 담은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 17년 10월, 조회 90

1

영화는 끝났다. 우리는 말 없이 극장 밖으로 나왔다. 지방 변두리의 골목 앞에서도 붉은 악마 티셔츠가 보인다. 술 냄새를 풍기는 붉은 악마 일행들은 저마다 축구 선수 아무개의 활약에 대해 큰 소리로 떠들며 지나간다. 영화는 좋았다. 이름을 잃은 소녀가 돼지가 된 부모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특히 소녀가 꽃밭을 해치며 나가는 장면의 작화은 일품이었다. C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장면 좋더라. 그래 그러게. 나도 대답한다. 우리는 어느 장면인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 장면에서 우리 모두 우와 하고 육성으로 감탄을 질렀기에. C와 나는 헤어진다. 사거리로 가던 C는 고개를 돌려 말한다. 나쁜 새끼, 이건 보고 죽지 말이야. 나는 또 대답한다. 그래 그러게.

 

2

며칠 후, C에게서 연락이 왔다. S의 유품을 태우자는 것이다. 그러자고 했다. S가 살던 아파트로 간다. 이 동네에선 제일 높은 아파트다. 아 저기가 S가 마지막 숨을 쉬었던 곳이구나.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다. 어머니가 건내 주신 S가 남긴 원고를 본다. 틀린 맞춤법들이 눈에 띈다. 콘티도 참 별로다. 그림 실력과 반반한 얼굴 외엔 쓸모가 없는 녀석. 내가 글을 써줘야 했던 녀석. 벽지의 하얀 십자가 자국이 아프다. 울지 말자. 울면 어머니가 또 우시겠지.

 

3

종이는 금새 타 버린다. 원고 용지에 스크린톤을 붙이고 먹칠을 하느라 애썼던 시간들이 허망할 정도로 종이는 금새 타 버린다. 야산에서 종이를 태우다니, 누가 올까 겁난다. S가 좋아하던 밴드의 음악도 틀어둬서 더 걱정이다. 보컬의 걸걸한 목소리가 숲 사이에서 요란하게 울린다. 부스럭 소리에도 뒤돌아 본다. 역시 우린 아직 너무 어리다. 시야를 산으로 옮긴다. 묘지도 하나 없는 이곳. 하얀 가루가 된 S가 있다니, 이 세상의 일 같지 않다. 아 그래, 이젠 이 세상의 일이 아니지. 마지막 불씨에 S 몫의 극장 티켓을 태운다. C와 남은 담배를 나눠 피고 산을 내려 온다. S의 남자친구에 대해 묻는다. C도 아는게 없나 보다. C에게 넌 요즘 어떠냐 묻는다. 여자랑 자는 건 역시 아닌 것 같다고 한다. 과장 섞인 몸짓으로 실패한 섹스 이야기를 한다. 나는 깔깔 웃는다. 나는 남자랑 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과장 섞인 몸짓으로 성공한 섹스 이야기를 한다. C도 깔깔 웃는다. 이렇게라도 웃어야지. 돌아오는 버스의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이 좋아서 싫다. S를 보내는 날도 햇살이 너무 좋았다.

 

4

극장에 다녀 온 애인님은 즐거움에 깡총 깡총 뜀을 뛴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꼭 안아준다. 나는 묻는다. 어땠어요? 극장에서 보니까 더 감동적이에요. 애인님은 토끼 눈으로 대답한다. 그럼요, 엄청 좋은 영화니까요. 나는 바보 같이 웃는다. 이름을 잃어버린 소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10년이 넘어 재개봉 한 날이다. 난 아직 이 영화를 다시 못보겠어요. 나는 더 바보 같이 웃는다. 애인님은 내 손을 잡아준다. 그래요,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같이 다시 봐요. 애인님과 트친들 이야기를 한다. 트친들이 타임라인에 몇 주 안보이면 걱정이다. 마음이 서늘하면 그가 메신져에 최근엔 접속 했는지 찾아본다. 아 어제 접속 했구나. 안심이다. 그래도 겁난다. 벌써 떠난 친구들 앞에 거기가 아무리 외로워도 이젠 데려가지 말라고 울고 빌어도 겁난다. 그런 날은 애인님 품 깊숙히 파고든다.

 

5

예약 시청 알람이 뜬다. 괜히 긴장 된다. 애니메이션 한 편 보는게 무어라고 물 한 컵도 갖다 놓고 침을 꿀꺽 삼킨다. 극장이 아닌 TV에서도 소녀의 모험은 여전하다. 꽃밭을 해치고 하늘을 날고 어른들과 싸우고 이름을 되찾아 집으로 간다. 작법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그 소녀는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지났기에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소녀가 신발을 신고 달려가는 순간 나는 눈물이 터진다. 그래 그래 여기까지 왔구나. 포기하지 않고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난 다시 애인님 품 깊숙히 파고 들어 운다. 서럽게 운다. 한번도 운 적이 없는 아이처럼, 여태 밀린 눈물을 그제서야 쏟아낸다.

 

6

눈을 감으면 친구들이 보인다. 그 친구들에게 약속한다. 맹세한다. 여기에 있겠다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힘든 날은 노래를 부르면 된다. 겁나는 날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면 된다. 아픈 친구를 보면 나도 그랬다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족한 위로, 그저그런 몇마디에 괜찮을거라고 이곳에서 함께 있자고 매일 매일 우리만 아는 약속을 한다. 그러면 조금 괜찮다. 그러니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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