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인 듯하다. AI는 이전까지 피조물의 위치에 있던 인간을 단숨에 창조주의 위치로 승격시켜준다. 이로써 사람들은 또 다른 질문과 마주했다. 바벨탑을 완성한 이후의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미지의 시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이런 세상을 상정한 작품들 중 대다수가 디스토피아적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당장 이 작품부터 시작해서, 연령대를 낮추면 <WALL-E>, 높이면 <매트릭스> 등등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창작자들은 이들 작품들 속에서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질문했다. <Bicentennial Bibliophile>의 저자도 그러했다.
작중 묘사된 인간은 말초적이며 원색적이다. 오성(悟性)을 버리고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에 집착할 따름이다. 이는 존재를 부정당한 허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 현생 인류를 생각하는 동물로서 정의한다. 당장 학명부터 ‘슬기로운 사람’이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기로움’ 따위는 아득히 넘은 상태다. 다시 말해, 인류는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능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물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가당착에 빠진 인류는 창조주라는 이름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위하며 인간 이하의 것으로 추락했다.
윤현은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철학자다. 그녀의 고민은 이런 허무감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철학자는 존재의 의미를 새로이 정리해야만 했다. 양차대전 이후의 철학자들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이전까지 인간에게 이성은 축복 그 차체로서 평가되었다.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이성은 인류에게 황금의 시대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약속했던 시대는 오지 않았다. 그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기만 했을 뿐이다. 이성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였으나 이성은 참혹함만을 남겼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 사조는 실존주의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길 멈춘 사상이다. 실존주의자들이 보기에 인간은 그저 ‘존재’한다. 그 이유나 의미, 즉 ‘본질’은 각자 스스로 찾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작중 윤현은 이 ‘본질’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인간은 왜 사는 걸까.’ 라는 대사에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다 그녀는 황재윤을 만난다. 그는 존재했다.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존재했다. 비록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물이지만 삶을 지속할 이유와 방법이 확실한 사람이다. 고독함과 허무감을 해쳐나가는 도구로서 책을 선택했다. 비록 소외되고 시대에 뒤떨어졌음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본질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마치 고귀했던 신전을 지키는 마지막 문지기 같다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필자는 한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It’s your father’s light-saber. This is the weapon of a Jedi Knight. Not as clumsy or random as a blaster. An elegant weapon, for a more civilized age.(네 아버지의 라이트세이버란다. 제다이 기사들의 무기지. 아무나 쏴대는 블래스터하고는 격이 달라. 고상한 시대의 우아한 무기란다.)”
– 오비완 케노비,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 中 –
윤현은 23세기를 살아갈 사람인 동시에 정체된 인간의 모습에 한탄한다. 스스로가 마지막 사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황재윤을 만난 뒤 가슴 벅찬 무언가가 그녀에게 찾아왔다. 이는 그녀가 찾고 있던 본질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본질은 비단 그녀 개인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을……왜 모르겠어.”
인류의 새로운 본질을 찾아낸 것이다. 이로써 작중 묘사되는 방황은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윤현은 다가올 세기가 그리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인물이다.
끝으로 작가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독서라는 소재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풀어낸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윤현이 자신의 고민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또 찾는다면 어떤 결론일지 읽는 내내 궁금해 했다. 윤현의 여정이 만족스럽게 끝났음을 본 필자는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필자는 작가의 디테일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작중 연도는 2194년. 즉, 23세기로부터 6년 전이다. 숫자 6은 완전수로서, 성경에서는 천지창조를 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다. 기독교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았고, 서양철학은 기독교의 신으로부터 인간을 탈피시키면서 인간의 존재를 재정립해야 했다. 이는 윤현의 여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과정을 작가는 연도로써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작품을 앞으로도 볼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