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감상

대상작품: 아들에게 (작가: 번연, 작품정보)
리뷰어: 리체르카, 17년 10월, 조회 71

이 글은 브릿지에 온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읽었던 글로, ZA공모전 당시에도 제게 꽤 깊은 울림을 주어 기억하고 있던 글입니다. 당시에는 아무 말 리뷰를 쓰기엔 너무 수줍고 부끄러워서 단문응원조차 남기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유료화 된 뒤에 생각나 다시 한 번 읽었고요. 리뷰가 없다는 이야기에 화들짝 놀라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고. 그리하여 총 세 번에 걸쳐 글을 재독 하게 되었군요.

그 어떤 이야기보다 잔혹한 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 글이 잔인하거나 끔찍한 묘사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덤덤한 표현, 숨이 막혀가는 아버지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솔직함으로 잔혹합니다.

좀비 사태가 발발했습니다.

인류에게 생존이 큰 시련이겠지만, 자폐아 아들을 둔 부모에게는 더더욱 큰 시련이었을 겁니다. 식량을 구하고 물을 구하는 것이 부차적인 문제가 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혹여 약탈자에게 식량을 빼앗기더라도 아이를 굶기지 않기 위해 개 사료까지 준비할 만큼요. 그런 것들을 챙기면서 아내는 맑게 웃습니다. 그 웃음이요, 다시 보니 형언할 수 없이 짠해요.

좀비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인가를 점령합니다. 그것들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리를 쫓고, 인간을 해친다는 것. 그러나 인간 이상의 힘은 낼 수 없는 무력하고 끔찍한 시체들.

아내는 또 다른 가족을 걱정해 남편의 충고를 무시했고, ‘미안해’하는 한 마디만 남기고 인간의 길을 끝마칩니다. 좀비로 돌아온 그녀가 어떻게 문을 열었을까요. 그만큼의 지성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실마리였을까요. 자폐아인 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상황이 위기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요. 오히려 그것이, 상황을 더욱더 극적으로 몰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심정으로 아내의 고기를 구워 먹였거든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한, 죽음을 생각하며 생을 내던지는 선택이었거든요.

하지만 아이는 감염되지 않아요. 오히려 그것을 더 찾게 됩니다. 이미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썰어 먹인 것 같은 기분인 아버지의 고통은 아들에게 고려할 바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어쩔 수 없는 문제이나, 아이의 반복되는 요구와 칭얼거림은 아버지를 지치게 합니다. 그는 그럼에도 아이를 위하여 이미 죽은 자를 다시 한 번 죽이기 위해 밤에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치료제가 개발되지요.

두 부자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염려하며 지켜보던 화자는 그 순간 안도감보다는 좌절과 절망을 진하게 느낄 겁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차라리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절망과 고독, 헤어나올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며 아사해가는 결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한 글이었다고 기억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치료제는 개발되었고, 좀비의 뱃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치료제 개발 시기까지 무너지지 않은 신선한 신체를 가진 인간의 인권이 어째서인지 진짜 인간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시기에, 사형집행을 앞둔 아버지는 그 이상의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묻고 싶네요.

실은 마지막 이 부분에서는 조금 동의하기 어려웠답니다. 그런 좀비들이 사람보다 더 우대받는 시대가 된다는 사실이요. 결국 그런 존재들 때문에 인간적인 삶을 박탈당하고 숨죽이고 지내야 했을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눌리게 될까. 오히려 사람을 죽인 자들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면 받았지, 더 존중을 받게 된다고? 아마도 치료제 개발 후 잠시간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이라는 느낌으로 환대를 받다가 점점 백안시당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까지는 알 수 없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지마는. 이들의 권리가 중요시되지 않았다면 아들의 아버지는 사형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요.

그리하여 아들에게 그런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인데 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봄에 발발한 사태가 여름까지 지속되는 동안 아내가 죽었고, 이후의 사태가 해결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작중 남편의 생각처럼, 생존자도 없고, 구원도 없죠. 그 많은 사람이 몇 달간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글은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식량을 갖췄고, 연료를 갖췄고,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한 준비를 했을 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떠났다가 그들과 같은 몸이 되었을까요? 굶어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았다는 이야기는 해답으론 미진합니다. 나라 하나가 괴멸할 만큼 죽은 뒤에야만이 비축된 식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몰입할 수밖에 없기에 화자를 따라갔을 때 맞닥뜨리는 최후가 너무도 끔찍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이며, 이야기 자체로의 완성도에 찬사를 보냅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실적이고 잔혹한 이야기여요.

현실적인 면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저는 주인공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이 혼자뿐이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단 사형이 내려져야 옳았을 거여요. 먹고살 것이 없으면 인육도 먹는 세상인데, 좀비 고기라고 먹으려 시도하지 않았을까요. 좀비를 잡으러 나갔을 때 한 사람쯤 마주칠 수도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서로 모른척하기 위해 애쓰며 지나가는 장면 같은 것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니까요.

살기 위하여 먹는다. 이 글을 읽으며 이만큼 짙게 의미를 상기해 본 적이 없었던 문장이어요.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먹어서는 안 될 것까지 먹어가며 삶을 이어가야 했던 부자를 보며 다시금 생각합니다. 먹어 살아남는다는 말이 얼마나 큰 울림을 가지고 있는지.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흘러가는데 화자에게 감정적으로 몰입이 깊게 되어 다른 부분들을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기 쉽네요. 약간 거부감 느낀 부분으로는 아내 시신에 굳이 얼굴을 묻어 섭취하려 했던 점이 있겠고, 텐트럼에는 자폐아들이 보이는 성향의 일종 등의 각주가 들어가면 더 깔끔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돌아버리지 않고 생존한 것이 대단히 존경스럽고, 모두 아들을 위한 부성애로 일구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기에 가슴 아프고. 이 글을 적으면서 더욱 힘겨웠을 작가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