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닮는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 질문을 해봅시다. 두 사람 A와 B가 있습니다. A는 C를 사랑했고, B는 D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C와 D는 서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이때, A와 B는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KRimmer 작가님의 <백합을 안은 노을>은 여기에 ‘매우 그렇다’라고 답하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어디까지 닮아질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 닮아야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까지 닮는 게 가능은 할까요? 우연히 닮았다는 이유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아닌 소설에서는 어디까지 허용될까요?
정나연은 동양화가입니다. 2년 전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납골당은 벽제에 있습니다. 정나연은 정우림의 여동생입니다. 그리고 정나연은 백합을 좋아했습니다. 옛 연인인 서준은 MMCA 서울관 큐레이터고, 노을에게서 나연을 봅니다.
정우림은 서양화가입니다. 3년 전 택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납골당은 벽제에 있습니다. 정우림은 정나연의 오빠입니다. 그리고 정우림은 백합을 좋아했습니다. 옛 연인인 노을은 MMCA 서울관 근처에 생긴 꽃집 사장이고, 서준에게서 우림을 봅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남매가 참으로 닮았군요. 물론, 남매가 비슷한 재능을 갖고 이를 개화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가족이 같은 납골당에 모셔지는 경우도 흔하죠. 1~2년 사이에 남매가 줄초상으로 죽는 것도, 글쎄요. 여기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라인이라고 할까요. 본래 가정의 악재라는 것은 겹쳐서 온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여기까지여야 했습니다. 읽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이 든 지점이 있었습니다. 둘 다 백합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남매가 취향이 비슷하거나 같을 수 있죠. 현실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입니다. 남매니까 그럴 수 있다고 포장하기에는, 슬슬 작위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 소설을 들여다보는 눈은 더욱 날카로워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차라리, 더 나아가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깊게 생각해서 아예 첨예하게 짜야 했다는 겁니다. 서준과 노을이 서로 초면인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연이 우림에게 서준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을까요? 우림이 나연에게 노을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을까요? 서준이 우림의 존재를 아예 몰랐을까요? 노을이 나연의 존재를 아예 몰랐을까요?
물론 남매가 서로 닮고 친하다고 한들 제 혈육의 연애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필요는 없지요. 제 연인의 혈육과 마주할 일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여기서 인물 설정이 발목을 잡습니다.
서준은 MMCA 서울관 큐레이터입니다. 르누와르-모네 특별 전시가 그의 기획이었습니다. 서양화에 대한 서준의 관심과 안목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노을은 그 전시를 좋아했습니다. 만약 우림이 살아있었다면 같이 보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서준이 전시 기획자로서 나연을, 더 나아가 우림을 알고 있었다면 그까지도 조명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노을은 어떤가요? 그녀가 꽃집 사장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적어도 우림이 백합을 좋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림이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한 번이라도 이야기했다면, 지나가는 이야기로라도 나연 역시 백합을 좋아했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 번 정도는 노을이 직접 나연을 위해 백합 꽃다발을 선물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남매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3년 전에 우림이 택시 사고로 죽은 일에 대해, 서준이 아예 남의 일인 것처럼 반응하는 건 이상합니다. 물론 우림이 죽은 시점에서는 서준과 나연이 서로 연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이후에 연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연에게 죽은 오빠가 있다는 것과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정도는 아닙니다.
반대로 노을에게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생깁니다. 우림의 죽음 이후로 종종 그의 납골당을 찾아갈 정도였다면, 그 이전에는 나연을 몰랐더라도 최소한 장례식에서 나연을 마주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서로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우연히 납골당 앞에서 둘이 마주쳤을 수도 있고요.
물론, 제가 지나치게 깊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억측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내세운 인물 설정과 우연적 사건들을 독자가 작위적이라고 느꼈다면, 독자는 그 작위성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뒤의 반응은 작품에서 재미를 잃고 독서를 포기하거나, 작위성 뒤에 남은 허술한 연결고리를 지적하는 것으로 귀결되고요. 저는 후자인 편입니다.
작가님의 의도는 아마 죽은 사람들의 인연이 산 사람들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우연이 어디까지 허용되는가는 재고할 문제입니다.
운명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입니다. 그리고 우연(偶然)이든 필연(必然)이든 그것은 자연스러운(然) 것이어야지, 작위적으로 느껴져서는 안 됩니다. 작위적으로 느껴졌다면, 차라리 끝까지 치밀해야 했고요. 끝까지 치밀하게 밀어붙였다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운명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요.
늦게나마 KRimmer 작가님을 변호하자면, <백합을 안은 노을>은 작가님의 브릿G 활동 기간 중 초기작에 속합니다. 인물 설정과 우연적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다소 아쉽지만, 운명적 사랑을 노래하고자 하는 작가님의 가능성이 충분히 보였습니다.
어쩌면 이후에 로맨스를 다루는 작품인 <당신의 어둠을 안아요>나 <비천(非天) : 하늘 아닌 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셨을지도 모를 일이죠. 게다가 이러한 설정들을 잘 녹여내려면 긴 시간이 필요한데, 두 작품 모두 중단편이 아닌 연재 작품이고요. 여력이 된다면, 이 부분에 대한 의문과 기대감을 안고 두 연재 작품을 읽어볼까 합니다.
여러모로 아쉬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작가님에게 기대감을 느끼는 이야기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