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서술 패턴이 주는 기시감들
필자는 이 소설의 전작인 ‘갤러리 아르테미스‘를 읽었다. 재미있었고, 속도감 있게 봤다. 작품이 완결되고 약 1주일이 지나 새로운 달이 시작될 때, 비슷한 제목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개러지 아프로디테‘. 어? 제목이 뭔가 닮았는데? 갤러리 아르테미스의 연작이겠구나 싶었다.
작가의 소설은 흥미롭고 또 재미있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다음화를 누르게 된다. 훅이 있다. 개러지 아프로디테 역시 재미있게, 후루룩 읽었다. 하지만 다 읽고서 리뷰 쓸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재미는 있는데, 대체 무슨 내용을 갖고 리뷰를 써야하나? 이게 처음 드는 고민이었다. 작가가 리뷰 공모에 부쳐: ‘아무거나 써주세요‘라고 하셨으나, 정말 아무 말이나 리뷰에 쓸 수는 없는 법. 작가의 향후 집필에, 작게나마 도움될 리뷰를 써야한다. 조금 따끔하고 아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뷰 공모의 목적이 조회수 늘리자고, 듣기좋은 이야기만 해달라고 하는 건 아닐테니. 동료 작가로서, 독자로서 작품을 읽고 느낀 문제점과 소감에 대해 진솔하게 말하고자 한다.
각설하고, ‘개러지 아프로디테‘는 전작 ‘갤러리 아르테미스‘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인물이 다르고, 이야기가 다른데 어찌 그럴까? 두 작품의 연작 성격상 골격이 같아서? 갤러리 아르테미스의 남주 노먼은 화가이다.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노먼의 작품을 갤러리 아르테미스의 오너인 여주인공 페기가 비싼 값에 사겠다고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주는 어마어마한 부잣집 상속녀이다. 그리고 가난한 화가 노먼을 가지고 논다. 그를 유혹해 관계도 갖는다. 개러지 아프로디테는 어떨까? 남주 스티브 달튼은 벤처 창업가이다. 개발자가 도망가는 바람에 파산하게 생겼다. V Lab에서 피칭을 하다가 리차드에게 망신을 당하는데, 여주 그레이스가 그를 구해준다.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그레이스는 중국계 여인인데, 역시 어마어마한 부자다. 페기와 차이라면 그레이스는 유부녀라는 것. 두 주인공은 역시 관계를 가진다. 작품의 결말은 자극적이며 다소 충격적이다. 갤러리에서의 결말이 조금 로맨틱했다면 개러지에선 변주가 가해진 것. 자가 복제이긴 하나, 두 작품은 골격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의 형식이 비슷하고, 여주와 남주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격차와 관계성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전작을 읽었다 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연작임이 분명하므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변주해서 자가 복제는 문제없다. 다만,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그 연작들과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술적(descriptive) 패턴의 문제다.
작가는 두 작품 모두에서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speech, FID)을 사용한다. FID는 주인공에 집중적으로 사용된다. 가령, ‘개러지 아프로디테’에서 남주인 스티븐 달튼의 내면은 아래와 같이 따옴표 없이 간접화법으로 자유롭게 기술된다.
성공이란 빛에 타죽게 생긴 불나방이 아니던가.
이번에는 그의 말을 들을 때가 되었다. 타죽기 전에.
(개러지 아프로디테, 2화)
자유간접화법으로 주인공의 내면을 작가가 자유롭게 기술하는 것은 강력한 텔링 기술이다. 텔링에 작가의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게 문제다. 아포리즘식 선언(‘미인은 권력이다’-갤러리 아르테미스 / ‘닫힌 셔터는 하나의 결론이었다’-개러지 아프로디테)과 따옴표 없는 수사적 의문문, 문장을 잘라 한 단어 또는 짧은 구로 줄바꿈하는 리듬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연작이 아닌 게 분명한 전혀 다른 장르의 작품에서도 작가는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작품마다 장르도, 주인공의 이름과 직업, 나이가 다른데, 인물들이 어째 죄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작가의 여러 작품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놈이 그놈이고, 다 비슷하게 느껴지면 이건 연작 소설이 서로 유사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작가가 작품 속에 화자로 직접 뛰어들어 기술할 때 패턴이 개입되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이것을 작가 고유의 문체라고 옹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체는 작가의 개성에 종속되는 것인가? 고유의 지문처럼? 그럴지도 모르지만 문체는 작품의 주제와 장르에 복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로맨스 소설에서도 SF에서도, 추리/스릴러물에서도 똑같은 문체로, 같은 패턴으로 기술된다면 그것은 작가의 지문이 맞음과 동시에 한계다. 물론 헤밍웨이나 하루키처럼 일관된 문체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그 일관성이 인물 차별화까지 희생시키는 경우는 다르다. 로맨스 소설에서도, SF소설이나 스릴러물에서도 주인공들이 똑같은 패턴의 문장으로 내면을 드러낸다면, 이것은 문체나 작가 고유의 지문이냐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작가의 창작적 한계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갤러리 아르테미스(로맨스)의 노먼을 한번 보자.
페기에게 돌아간다?
그것은 분명 고갈된 관계에서 남은 커피향 같은 것이었다.
(갤러리 아르테미스, 20화에서 발췌)
다음은 작가가 최근 연재중인 ‘신단수’라는 SF작품이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랬던가?
이 공간에서는 과학과 사이비가 모두 하나 같았다.
(신단수, 1화에서 발췌)
두 장르의 남자주인공은 스스로 속으로 질문을 던진 후, 어떤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자유간접화법의 유사 패턴은 주로 주인공에게 집중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조연에게도 가끔 사용된다. 따라서 선택적/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표현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이러한 패턴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다양한 장르에 걸친 작품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조형을 하나로 뭉뚱그린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인식을 주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독자의 의식 수면 위에서 확연히 포착되는 건 아니고, ‘뭔가 설명하긴 어려운데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든다’는—무의식 레벨에서 감지되는—희박한 기시감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기시감은 리뷰를 쓰고 싶은 의욕을 꺾는다. 뭔가 반복되는 것 같고 어디선가 본 듯한 기이한 느낌 때문에,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조차 리뷰 쓰길 머뭇거리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가설에 불과하다. 작가가 이 가설을 받아들여 서술 패턴에 변주를 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선택이다.
텔링과 쇼잉의 균형 배분
이제 본격적으로 작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조금 깊게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슬픈거북이 작가님 작품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소설 전반에 공통되는 작론이다.
소설 쓰기는 작가가 구축한 법경(法境)을 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예술이다. 법경이란 인간의 상상력으로 구현되고 재현되는 세계를 뜻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으로 이야기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글로 전달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영상과 소리로, 웹툰 작가는 그림과 글로 법경을 시청자와 독자에게 전달한다. 글로써 이 법경을 독자의 머릿속에 재현시키기 위해 작가는 시점을 선택하고, 문체를 선택한다. 슬픈거북이 작가가 ‘개러지 아프로디테‘에서 쓴 시점은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이것은 텔링에 굉장히 강력한 도구이면서 한편으로 위험성도 높다. 텔링으로 유명한 작가들도 많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대문호들이 바로 이 텔링의 대가들이다. 텔링을 할 때, 작가의 감정, 철학, 세계관이 개입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 개입이 너무 잦아지고 반복되면 독자는 비슷한 목소리에 수렴하게 된다. 따라서, 텔링을 할 땐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인물 내면의 감정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다소간의 절제가 필요하다. 작가가 거기에 이입해서 설명한다면 읽는 독자로선 통쾌하고 맛깔나게 느낄 순 있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서도 그게 반복되면 독자는 곧 기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 이거 어디선가 본 건데? 작가 특유의 텔링 패턴 때문에 갤러리 아르테미스와 개러지 아프로디테에 이어 신단수를 읽는 독자들은 기시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 작가의 작품은 장르가 달라지고 이야기가 달라져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비슷하네, 주인공은 작가를 대변하는 건가? 독자가 이렇게 느끼면 곤란하다. 등장인물은 작가의 아바타가 아니라 독자적 존재여야 한다.
만약 텔링과 쇼잉을 밸런스있게 유지하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풍부한 다양성을 먹고 자라나게 된다. 텔링을 50% 정도 한다고 하면 나머지 50% 쇼잉으로 말해지지 않은 여백에서 독자는 자기 경험과 상상력으로 베리에이션을 만들고 각자 조금씩 다른 자기만의 세계를 상상해낸다. 다만 텔링이 너무 강하면 이게 잘 안된다.
작가는 ‘개러지 아프로디테‘를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강한 텔링을 보인다. 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주인공 내면으로 다이빙해 들어가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독자에게 여과없이 설명해주고, 다시 등장인물은 거침없는 감정들을 욕설을 섞어 내뱉는다. 갤러리 아르테미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독자는 작가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따라가면서 와, 이렇게 되는구나! 박수 치면서 따라간다. 설명을 다 들었기 때문에 상상으로 법경을 조형할 이유가 없다. 다 설명됐으니까. 인물에 몰입하는 대신 작가의 설명을 보고서 아, 그렇군! 하고서 이해한다. 그리고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잊어버린다. 독자는 상상할 여지가 없으면 보고 바로 흘려버리게 된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마음에서 프로세싱이 동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되어지는 것의 장점이자 곧 단점이다. 묘사가 이뤄지고 여백을 주게 되면 독자는 그 여백에서 상상을 하고 인물 속으로 들어가 공감하지만 작가에 의해 설명되어버리면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고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차이다. 인물에 몰입되지 않고 이야기는 멀리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시작했다가 불현듯 끝나버린다.
다른 소설의 주인공들은 서로 당연히 달라야 한다. 화가 노먼과 창업가 스티브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독자로서 그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작가의 서술과 대사로 조형된 두 캐릭터들을 보면서, 왠지 닮았다고 느낀다. 두 작품이 연작이어서 인물들이 서로 닮았을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텔링 방식 때문에 독자가 그렇게 느끼게 된다면 더욱 문제다.
조연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의 작품 속 조연들은 주인공에게 재기발랄하게 대사를 친다. 그런데, 그 인물들이 다른 작품들 속에서 이름만 갈아끼운 채 다시 등장한 것처럼 느껴진다. 욕설을 내뱉고, 팔팔 살아있는 언어들을 내뱉지만 어디선가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 등장했던 조연들과 겹친다. 인물 조형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작가가 조형한 인물들이 독자에게 상상되어 법경 위에 뚜렷이 떠오르기 전에 작가의 텔링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어버리기 때문에 독자는 아, 하고 끝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아, 재밌다, 그런데 리뷰로 뭘 써야하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재미나 예술성, 문학성, 난해함이나 작가에 대한 호감/비호감 문제가 아니다.
텔링 방식의 고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예로 들어보자. 작품의 남주 다아시와 여주 엘리자베스 그리고 조연들의 캐릭터 조형은 명확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제인 오스틴은 텔링 뿐 아니라 대사와 행동 묘사를 통해 쇼잉으로 캐릭터들을 구축하는 데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래서 입체적인 인물들이 만들어졌다. 작가의 후기작 ‘설득‘에 나오는 여주 앤 엘리엇은 엘리자베스 베넷과 공통점이 많지만 전혀 다른 인물로 느껴진다. 이 인물들에는 제인 오스틴의 실제 경험이 녹아들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 제인 오스틴이 곧 엘리자베스 베넷이라거나, 앤 엘리엇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독자의 입에 작가가 직접 떠먹여줄 것이냐, 아니면 독자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직접 손으로 알맞은 크기로 썰고 소금과 후추를 쳐가며 먹게 할 것이냐인데, 텔링이 나쁘다는 얘긴 아니다. 텔링도 쇼잉만큼 중요한 도구다. 다만 절제되어야할 곳에서 텔링을 억제하지 못하는 건 모든 작가들에게 뿌리치기 힘든, 악마의 유혹과 같다. 텔링은 강력하고 친절하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글 쓰다보면 그런 욕구에 시달리곤 한다. 그래서 초고를 보면 설명으로 범벅된, 독자를 믿지 못해 작가가 야구 중계 해설자에 빙의된듯한 문장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해설자의 입담에 열광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해설자의 TMI를 싫어할 것이다.
지난 몇달 간 슬픈거북이 작가의 작품을 흠미롭게 읽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느꼈던 소감을 정리해보았다. 작가의 작품들 중 쇼잉 방식으로 쓰여진 작품도 보인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엽편 소설이 그 예이다. 작가는 아마도 여러가지 서술 방식을 실험중인 것 같다. 텔링과 쇼잉의 균형 잡힌 배분을 통해 보다 입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 세계로 발전해가시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