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8 기준 최신화인 19화까지 읽은 후의 리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또한 아래 리뷰는 개인적인 감상이며 작가님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들어가며
인류를 찍거라
“인류를 찍거라” 라니. 궁금하지 않나요. 왜 ‘인류’를 찍어야 하나요? 왜 인류를 ‘찍어야’ 하나요? 인류란 무엇이고 찍는다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이 대사는 초반의 분위기를 강하게 틀어쥐지요. 첫 회차를 읽었을 때의 감정이 떠오릅니다. 긴장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었죠. 이렇게 초반부터 강하게 각인 된 문장은 이후 작품을 읽을 때 유용하게 작용합니다. 독자가 글을 읽을때 떠올리게 될 부표이자 베이스캠프가 되기 때문입니다.
리뷰에 앞서 제 독해 방향을 명시해야겠습니다. 제가 읽기로 이 작품은(19화까지는) 화자와 이안의 우정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진을 찍는 인간 ‘이었고’ 이안이 현대에 적응하지 못한 늑대인간이라는 점이 이 작품을 이 작품답게 만드는 요소기도 하지요.
인류를 ‘찍거라’: 피사체와 친구.
‘나’는 사진사인 ‘스승’의 밑에서 사진을 배우는 조수입니다. 사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진은 순간을 박제하는 행위입니다. 사진사가, 피사체의 현실을 포착하는 것이지요. 현대의 사진 기술이 발달하여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해도 사진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찍힌 피사체는 현실이 아닌 사진에 고정됩니다.
여기서 장면 하나를 끌어오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화자가 이안을 찍게 되는 장면인데요. 두 인물이 사진기를 두고 대조되는 장면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반짝 터졌지만, 늑대인간 이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꿈이 사진작가지만 플래시 터지는 순간에 움찔해서 맨날 사진을 망치는 나와 반대로. 이렇게 보니 이안은 새삼 나와 정반대였다.
화자는 자신이 한심해서 자조하지만 이안은 “순수하고 커다란 눈”으로 화자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하죠. 제게는 그 순간이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된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사와 피사체에서 벗어나 실제로 접촉하고 눈을 맞출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요.
그러나 스승은 그걸 원하지 않았죠. 사실 그는 작품 안에서 꽤나 악의를 가진사람처럼 그려지는데요. 글을 모두 읽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저 늑대 인간이 두려웠을 뿐이고, 제자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죠. 그러나 ‘나’는 이미 이안을 알아버렸습니다. 늑대인간이 아닌 친구인 이안 말이죠. 그렇게 조수를 그만 둔 ‘나’는 이안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안은 누구일까요. 이안에 대한 정보는 아직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간접적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60년 전, 친구인 (젋은 시절의)할머니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해야했던 아이. 굶어죽기 직전이었던 아이. 그럼에도 마을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 아이가 바로 이안입니다. 이안은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할머니는 과거 이안의 태도를 보고 이렇게 말하죠.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처럼 행동했다”1고요. 그리고 이안은 늑대인간 중에서도 ‘늑대 변신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며 ‘회색 늑대 무리에서 하얗게 태어난’ 몇 되지 않는 늑대인간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배척당하며 생명이 위중할 때에도 그를 도울 사람이라곤 ‘나’ 뿐이었던. 시간에서도 유리되어 현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로운 인물이요.
그런 인물의 삶이, 그 시계의 초침이 비로소 흐르게 된 순간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인류’를 찍거라: 농축된 혐오
인류와 늑대 인간은 꽤 오래 변주되어온 소재죠. 늑대인간은 늑대도, 인간도 아닌 경계에 놓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늑대인간은 조금 다릅니다.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고, 인간보다 강인한 육체가 작품 안에서 두드러지지도 않습니다(달리기와 회복력은 제외합니다). 오히려 독으로 인해 약해지기만 하죠. 두려워 할 명분이라는게 모두 소거 된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대체 뭘 두려워하고 경멸하는걸까요.
다소 모호하거나 개연성이 부족해보일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의 적대감은 꽤 순도 높은 배척으로 읽혔습니다. 가게 주인이 독을 마시게 한 것이 초반의 주된 사건이 되고2, 처음 이안과 ‘나’가 함께 살게 됐을때 경찰이 들이닥친 것도 마을 사람이나 이웃 누군가가 신고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혐오에 이유가 있던가요? 나, 우리, 인류와 다르다는 이유 만으로 우리는 외부인이 죽을만큼의 악의를 드러내기도 하지 않나요? 그 악의는 회차가 진행될수록 ‘나’와 이안을 둘러싸며 조여옵니다. 설정과 장면의 이음매가 헐겁긴 합니다만 방향성은 일관되어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감상을 남겨둘까 합니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올까요. 앞에서 사진은 순간을 박제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진은, 사진사는 ‘셔터를 누르는 사람’, 즉 피사체를 고정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찍어야하는 이유는 이렇게 해석되겠죠.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인류만을 보고, 기록하고 싶다
정도로요. 인류 외의 존재를 ‘직접 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인거죠. 로그라인의 그 문장은 스승이자 마을 사람들 등의 태도가 압축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정은
이안과 ‘나’의 우정 이야기가 이 글의 주된 내용이라고 했지요. 실제로 독 사건을 통해 두 사람의 세상은 넓어집니다. 관계는 끈끈해지고, 새로운 의사 인물도 나타나죠(뭔갈 감추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런 복선은 작가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것 같아 기대 중입니다). 무엇보다 과거의 어딘가에 갇혀 현대 문명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안이 처음 하게 되는 일이 많아집니다. 주인곳이 말한 것처럼, “누구나 처음에는 못”하는 과정을 지나면서, 조금씩 삶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이 둘을 보며 자꾸만 자문하게 됩니다. 인류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이 저를 모르셨던 겁니다. 저는 늘 생각했어요. 왜 인류만을 찍어야 할까. 인류가 아닌 자들은 생명체가 아닌가? 혹 생명이 없어도 찍을 수 있지 않나? 계속 생각했어요. 카메라가 닳고 닳도록 생각했어요.3
서로 이해하지 못함에도 태생으로 묶이는 존재들로요.
우리는 어쩌면 카메라라는, 인류라는 창으로 너무 많은 것을 왜곡해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억눌렀던 말을 터뜨리고 스승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안 때문만은 아닐겁니다. 오래도록 생각해왔음이 암시되니까요.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인류가 아닌 것을 찍었을 때 ‘나’는 무언가 알게 된 게 아닐까요. 인류라는 틀에 가두었던 뷰파인더에, 사진에, 액자에 인류가 아닌 무언가도 담길 수 있음을. 그랬을 때 우리와 그들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독 사건 이후에 악역으로 비춰지던 스승이 갑작스럽게 죄를 마주하고 고백한 이유도 해소됩니다.
네 늑대인간 친구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주렴. 내 잘못을 이제야 마주하게 되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생명을 해치는 것 까지는 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스승은 ‘나’를 통해 늑대인간에 불과했던 이안을 알게 되었고, 사진이 아닌 사람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요.
마치며
흔히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서로와, 세상과 소통하는 창으로요. 순간을 박제하는 사진이 아닌, 끝없이 바뀌는 세상을 살아있는 눈으로 담는 창 말입니다. 이안의 눈을 통해 ‘나’가 스튜디오 바깥의 세상으로 향하고, ‘나’의 눈을 통해 늑대인간이 아닌 이안을 보게 된 스승처럼. 어쩌면 우리는 박제가 아닌 연속으로 세상과 이어져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외의 대부분의 내용은 댓글들로 말씀드렸으니 그것으로 갈음하고… 리뷰 공모에 부치는 말에 따라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제가 읽기에 작가님의 글은 방향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제가 자의적인 해석을 펼쳤다고 해도 작품의 골격이 그걸 받치지 못한다면 제가 리뷰를 이렇게까지 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개연성으로 묶이는 지점이긴 한데, 복선을 던지고 회수하는 부분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건은 끊임없이 엮이며 이어지니 큰 흠결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러나저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면 글의 방향이 곧을 수 밖에 없죠. 그 외에 단점으로 불릴 수 있는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나 전개의 거침, 인물의 깊이나 개연성 등은 습작으로 해결됩니다. 문장이나 묘사는 더더욱 그렇고요.(사실 묘사도 저는 좋았지만요. 그리고 ‘못했다’와 ‘안했다’의 차이를 구분해서 장치로 쓰실 정도면 언어에 대한 이해도 풍부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 단점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은 많이 읽고 많이 쓰다보면 자연히 느는 부분입니다.
제가 뭔가 조언을 드릴 입장은 못 되지만, 한 마디만 얹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지금의 작가님은 부족한 점을 찾기보다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요.
예를 들어보자면, 읽으면서 생각한 인물 대사의 생동감 부분인데요. 대사와 인물들은 전형적인 감이 있지만 대사만으로도 인물들이 구분될 정도로 살아있습니다. 거의 대사들로만 이어지는 회차가 있는데도 큰 어려움 없이 읽힌다는 점은 분명 강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형성 때문에 비슷한 역할의(작중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인물들끼리는 종종 구분이 어렵기도 했어요.
여기선 좀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역할마다 인물을 한 명만 세울 것인가(예를들어 악역 하나, 주인공 두어명) 아니면 인물을 구분할 방법을 대사 외에서 찾거나. 그렇다면 한번 쯤 장면 위주의 집필을 해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좀 거칠게 예를 들자면
“A의 대사”
“B의 대사”
“A의 대사”
보다는
“A의 대사”
A의 대사에 대한 행동묘사, 심리묘사 + 이어 나올 B의 대사를 짐작할 수 있는(연결고리인) 묘사
“B의 대사”
이런식으로요. 예시가 이런 이유는 별 거 없고 제가 그냥 이렇게 쓰기 때문입니다…
중간중간 그 대사를 하는 인물의 행동이나 상대 대사를 듣고 보이는 반응 정도만 묘사해주는걸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속도감이 깎이겠지만 장면이 풍부해질 수 있겠죠. 독자가 상상하게 될테니까요. 그리고 묘사는 관찰만 해도 금방 늡니다.
결국 선택의 문제입니다. 추구미의 문제고요. 실제로 고전들도 대사로 몇 페이지를 채우는 경우도 있고, 모든걸 묘사로 채우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지금은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 생각해보시는 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재작은 정말 오랜만에 읽는데,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법은 이제… 저 말고도 잘 알려주실 분들이 많으니 다른 분들께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저도 여기서 많이 배웠기도 하고요.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