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심령 사이, 아이의 목소리 감상

대상작품: 두절된 약속 (작가: 적사각, 작품정보)
리뷰어: 영원한밤, 2시간 전, 조회 18

본 리뷰는 최대한 스포일러는 배제하였습니다.

작품을 읽으면 단문응원은 꼭 남기려고 하는 독자이지만, 리뷰는 선뜻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리뷰를 쓰고 싶어질 때는 대부분 다 읽었는데 밀려오는 감상에 비해 생각은 많아지지만 그 생각이 정리는 되지 않아 작품을 뜯어보고 해체하고 탐구하고 글로 남기고 싶을 때입니다. 이미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선명하여 굳이 제 리뷰가 아니더라도 작가님이 주고자 했던 감상이 모든 읽는이에게 전달될 것 같으면 굳이 리뷰로는 손이 가지 않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비교적 선명한 메시지의 작품이라도 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최대한 스포일러를 배제하고 작품을 소개하고 싶을 때입니다.

이번 리뷰는 후자입니다. 적사각 작가님은 매력적인 작품들을 많이 쓰셨고, 그 중에서 지극히 SF를 다루면서도 작가님 특유의 인간적이고 아련한 감성이 묻어나는 ‘루나시티’ 세계관 작품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큐레이션도 했었습니다. 이번 작품도 작가님의 또다른 세계관의 구축을 위한 발판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작품이라, 그 첫 걸음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리뷰를 써 봅니다.


1. 두절 — 끊어진 세계와 닿지 않는 목소리

작품은 주빈이라는 아이가 미로 속을 헤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이는 X자가 보이는 곳을 찾아가려 하지만, 미로는 계속 바뀝니다. 보라색 여우불은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아이는 밝은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이는 왜 그곳에 있을까요. 미로는 왜 계속 바뀔까요. 보라색 여우불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아이가 부르는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지. 작품은 이 질문들에 곧장 답하지 않고, 장면을 바꾸어 심령술사 서옥과 의뢰인 대인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불안을 넓혀갑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정서는 ‘두절’입니다. 가상세계 VeX와 현실은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온전히 이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아이, 주빈은 분명 그 안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 쉽게 규정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가상세계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설정은 그 단절감을 잘 보여줍니다.

작품 속 가상세계 VeX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지만 닿지 못하는 목소리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아이는 미로를 헤매고, 무언가를 찾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만, 그 말이 제대로 도착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가상세계의 구조보다도 그 안에 남겨진 외로움이 먼저 찾아옵니다.

의뢰인인 대인과 심령술사 서옥의 대화는 이러한 두절을 강화합니다. 대인은 상황을 기술적 문제처럼 설명하려 하고, 서옥은 그 안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음을 감지합니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작품 초반의 긴장감을 책임지는 이 어긋남의 끝은 어디일까요.

두절은 단순히 접속이 끊긴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계와 세계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어떤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 생긴 단절까지 포함합니다. 작품은 그 끊어진 틈을 조용히 따라갑니다.

 


2. 약속 — 남겨진 말과 기다림의 정서

제목에 포함된 또 다른 단어는 “약속”입니다. 약속은 거창한 맹세나 명확한 계약은 아닙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지켜졌어야 할 것들, 누군가를 외롭게 두지 않는 일,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 그리고 존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아이는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찾고, 사라지는 여우불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에는 설명되지 않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주빈의 기다림이 작품 전체에 조용한 슬픔을 깔아둡니다.

그 기다림은 깨진 약속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약속입니다. 이미 누군가는 잊었거나 외면했을지 모르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 약속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품은 그 기다림을 과장된 비극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의 천진한 말과 행동을 통해 약속이 끊어진 자리가 얼마나 쓸쓸한지를 보여줍니다.

약속이 두절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연락이 끊겼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믿고 있던 세계가 응답하지 않았고,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관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한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빈의 기다림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약속은 제목처럼 이미 두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잊어버렸거나 외면한 약속이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약속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이 희미한 약속의 감각이 작품을 단순한 사건 중심의 이야기보다 더 오래 남게 만듭니다.

 


3. 서옥

영화 「파묘」가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주 잘 짜여진 캐릭터도 한 몫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예고편에서부터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했던 ‘이화림’은 등장 때 마다 눈을 못 떼게 만들었는데,  본작의 심령술사 서옥은 그 ‘이화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는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작품이 진행될수록 그는 돈이 목적인 해결사가 아니라 점차 아이의 기다림에 접근하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해결사나 사건 의뢰를 수행하는 인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현실과 가상세계, 기술과 심령, 의뢰인의 설명과 아이의 존재 사이, 그 끊어진 지점으로 직접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서옥의 매력은 의뢰인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의뢰인인 대인은 상황을 기술적 문제로 설명하려 하고, 개발상의 위험이나 처리 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심령술사인 서옥은 그 안에 남은 존재를 쉽게 오류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기어를 착용하고 가상세계에 접속하며, 그 안을 탐색하는 모습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외부 조력자로 그려지지만 서옥은 그에 그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을 가상세계 안에서 확인하려 하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가려 합니다.

이 매력적인 주인공 서옥은 가상세계의 이상 현상을 처리하는 사건을 감정어린 이야기로 끌어올리는 힘을 가집니다. 끊어진 접속을 다시 시도하고, 닿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 하며, 기술적 설명만으로는 정리되지 않는 존재를 마주합니다. 끝내 작품의 정서를 바꿉니다. 서옥이 마주한 결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작품의 태그에는 #오컬트가 붙어 있습니다.

분명히 오컬트적인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충격적인) 장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작품 중 서옥의 독백 속에는 ‘남륜’이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정작 ‘남륜’은 작품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두에 밝힌 제가 리뷰를 쓰는 이유 중 하나인데, 작가님의 최근 작품에서 드디어 ‘남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대적인 감각의 오컬트 세계관이 펼쳐지길 기대해 봅니다. :star-struck:

 

닿지 못한 말이 있고,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있고, 그 경계에 다가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갑고 기묘한 설정 위에 내려앉은 조용한 슬픔.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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