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짝사랑 또는 동경심 비평

대상작품: 레노어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작가: 벽라,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14

가벼운 리뷰만 쓰겠다고 했는데…

 

[왜 이 소설에 관심이 가게 되었는가]

일단… 또 내 이야기부터 늘어놓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현실에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다. 세계에 무관심하고, 스스로에게도 무심하다(온라인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거나 무의미하게 느낀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는 나에게 다정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 또한 세계에 닿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다정함이 문제다. 세계의 다정함은 의도하지 않게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 나는 세계도 변화시키고 싶지 않고 나 자신도 변화하고 싶지 않기에, 그 다정함이 때로 너무 날카롭다. 그래서 뫼르소의 마지막 독백 —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 — 에 이상하리만치 공감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때문에, 필자가 쓰는 소설들은 대체로 그 반대 방향을 향한다. 스치고 지나가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인연, 서로를 변화시키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들. 내가 현실에서 원하는 것을 소설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의 리뷰 또한 그 선 어딘가에 존재할거라 언급해두겠다.


 

교수형을 앞두고 고해성사처럼 편지를 쓰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사실만을 나열하는 화법, 그리고 사회의 언어로는 번역될 수 없는 욕망을 안고 죽어가는 결말. 이 소설의 톰은 어떤 면에서 뫼르소의 변주다. 다만 뫼르소가 세계에 무심한 자라면, 톰은 세계에 끝내 닿지 못한 자다.

 

[이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필자의 세계관에서 관계의 이상적인 형태는 이렇다. 서로를 변화시키지 않는 상태로 접점만을 이루는 것. 스쳐 지나가지만 기억에 남는 인연. 그것으로 ‘이해’가 가능하다면 충분하다. 그것을 로맨스로 쓴다(극T가 쓰는 로맨스…).

반면에 서로 침식해 들어가면 호러, 끝내 닿지 못한다면 짝사랑이다. 여기에 따르자면 톰의 이야기는 짝사랑에 해당한다.

다만 이런 필자의 기준에서 본다면 톰의 욕망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의 욕망은 선생님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선생님이 속한 세계 전체를 향한 것이고,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바꿀 용의가 있어 보인다.
필자가 원하는 것이 ‘접점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이해’라면, 톰이 원하는 것은 ‘저기에 들어가고 싶다, 나를 바꿔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라도’에 가깝다. 그 부분이 달랐다. 내 경우 그건 호러로 표현되며, 만약 그 부분을 내가 썼다면 톰이 실제로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꿔서 선생님의 세계를 침식시켜서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읽으면 그는 담벼락을 넘은 순간부터 자신이 이물질임을 알고 있다. 선생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 동경심이 이해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필자가 말하는 ‘접점을 이루는 이해’를 원한 짝사랑이다.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닿을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짝사랑으로 끝난.

저는 그 고백이 받아들여지길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 이 짝사랑이라고 하기에도 머쓱한 이세계(異世界)를 향한 동경이 선생님께 이해받기를 원했습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인 [대지신의 사랑]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나온다. 데헤못은 샨의 세계를 그의 바로 발 밑에서, 그러나 그 세계에 절대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다.

 

[불편한 부분]

레노어 선생님이 저지르는 행위들 —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 은 분명히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범죄다. 이 소설은 그것에 대해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만 화자인 톰의 시점에서 그것이 오히려 ‘속하고 싶으나 들어갈 수 없는 불가침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독자는 윤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 소설의 약점이라기보다는, 톰이라는 화자의 세계관 자체가 빚어내는 필연적인 왜곡으로 읽힌다. 그는 처음부터 ‘정의’나 ‘도덕’이 아니라 ‘닿을 수 없음’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감정의 번역 불가능 또는 세계관의 번역 불가능]

[이방인]의 핵심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번역 불가능성’이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프지 않은 게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슬프지 않다. 톰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레노어 선생님에게 품은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짝사랑이라고 하기에도 머쓱한, 이세계를 향한 동경.

그리고 두 소설 모두, 그 번역 불가능성 때문에 주인공은 처형당한다. 뫼르소가 살인의 동기를 설명하지 못해 재판에서 패배하듯, 톰은 왜 그 노인을 죽이게 되었는지를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리치몬드 가의 시절에 대한 울분”, 어쩌면 “불가침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데에 대한 슬픔”이었음을 독자만 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단순한 [이방인]의 변주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있다. 톰에게는 너무도 선명하게 원하는 세계가 있다. 카뮈의 부조리는 ‘세계는 원래 무의미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이 소설의 부조리는 ‘나는 거기 들어가고 싶은데 날 때부터 허락되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온다.

어쩌면 그 때부터 세상에 내가 침범할 수 없는 세계가 있구나 하고 저는 실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는 제가 날 때부터 그냥 들어갈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란 걸 확연히 느꼈습니다.

 

[더 구체적인 부조리]

뫼르소는 처형 전날 밤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을 느끼며 평화로워진다. 필자가 거기에 공감하는 것은, [이방인]이 말하는 무관심이란, 냉담한 게 아니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세계가 나를 그대로 두는 것, 그것이 뫼르소가 마지막에 얻은 것이다. 뫼르소에게는 ‘닿고 싶은 세계’가 없다. 그는 세계에 무심하기 때문에 이방인이다.

톰의 마지막은 다르다. 그는 군중 속에서 선생님의 회색 눈동자 한 쌍을 발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고 쓴다. 끝까지 무언가를 향한다. 다음 생에는 아랍의 여인으로 태어나 선생님과 함께 서로의 테두리를 매만지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 이것은 뫼르소의 ‘수용’이 아니라, 끝내 이루지 못한 접점을 향한 갈망이다. 계급과 성별과 출신이 만들어내는 불가침의 영역. 톰이 느끼는 부조리는 카뮈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고 구체적으로 쓰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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