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도 기록관리인작가 님의 글을 인상 깊게 봤다.
처음 작품 소개를 보면 아파트 단지 앞에 사후재생체 관리센터가 들어온다는 님비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렇다. 현우는 단체방을 운영하고, 공청회에 나가고, 플랜카드를 들고,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게 단순한 혐오시설 반대 운동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된다. 그 관리센터 안에 현우의 아버지가 있었던 거다.
루세온-β 바이러스 설정이 촘촘하게 쌓여 있어서 세계관이 납득이 된다는 것도 좋았다. 바이러스를 이겨냈더니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나고, 재생체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고, 제약회사가 다시 희망을 팔고, 그 희망이 고문이 되어 아무도 소각하자는 말을 못 하게 되는 흐름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혔다. 세계관 설명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게 대단하다고 느꼈다. 작가님이 이 세계를 얼마나 꼼꼼하게 설계했는지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화유리벽 앞에서 현우가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 협상의 무대에서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이 준비했던 말들을 전부 잃어버리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눈은 떴지만 눈빛은 없는 아버지. 그 사이 1274번이라는 숫자 하나가 얼마나 많은 걸 함축하는지. 서정적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좀비물인 줄 알았는데 읽고 나면 결국 가족 이야기였다는 게 한참 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이제… 냄새는 안 나겠네, 라는 마지막 대사도 웃픈데 씁쓸하게 오래 남는다.
사실 이런 소설이 제일 무섭다고 생각한다. 괴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피가 튀기는 것도 아닌데,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게 만드는 이야기. 작가님 특유의 담백한 문장이 오히려 감정을 더 세게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다.
p.s 만약 이 장소가 실제 있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며 만들었습니다. 무료 이미지를 조합해서 포토샵으로 편집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