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이곳은 ‘경성’이라는 곳이다. 다만 일제시대의 그 경성이 아니라 일제시대와 근미래 또는 현대가 교묘히 뒤섞인 가상의 도시다. 사립탐정이자 스스로를 ‘깡패’라 비하해 부르는 주인공 나이토 히데오는, 로봇 조수 아발론과 함께 흥신소를 운영한다. 그는 “아이가 싫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어느 날 경성의 유명 여배우 신영채가 찾아와 아이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한다. 공개적으로 알려지기를 꺼리는 아이, 즉 존재를 지우고 싶어 하는 아이다. 의뢰를 거절하던 주인공은 구두닦이 소년 ‘김 군’과 얼떨결에 가까워지고, 아발론과 함께 투닥거리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김 군이 사라지고, 아발론마저 폐기된 고철로 발견된다. 히데오는 즉각 스승의 저택을 찾아간다. 와인 창고의 숨겨진 문 안에서 그는 신영채의 아이였을지도 모를 소년, 김 군, 그리고 다수의 소년들의 시신이 방치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다. 스승이 범인이었다.
의뢰는 완료되고, 히데오는 말없이 그 저택을 나선다. 경평전 경기장에서 신영채는 새 남편 후보와 나란히 카메라에 잡히고, 히데오의 사무실에는 평소처럼 전화벨이 울린다.
[신영채라는 인물]
의뢰인이었던 여배우 신영채가 스승의 아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 반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찾아달라’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없애달라’는 소망이 있다. “제 어미를 본 적도 없는 아이를 찾아서 죽여 달라는 여배우”라는 히데오의 독백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차가운 한 줄이다. 그녀는 스승의 아내였고, 어느 아이의 어머니였고, 의뢰인이었다. 그 세 가지가 한 인물 안에 동시에 있다.
사건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경평전 관람석에서 카메라에 잡힌다. 죄책감의 흔적은 없다. 소설은 그녀를 악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카메라 앵글처럼 보여주기만 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조수는 로봇이어야만 했는가]
아발론(잠시 왜 하필 이름이 아발론인지까지도 파고들어야 하나 싶긴 했지만 패스)이라는 로봇이 등장함으로써, 이곳은 일제강점기의 ‘경성’ 자체를 가리키지 않게 된다. 일제강점기라는 과거와 근미래의 서울, 현실과 비현실을 교차하여 어떤 가상의 ‘경성’이라는 도시를 만든다.
아발론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로봇’이다. 아발론은 AI가 고장 난 불량 로봇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가장 인간적이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다. 주인을 비난하고, 혼자 김 군을 찾아 나서고, 결국 고철이 되어 발견된다.
인간 조수였다면 이런 행동은 의리나 아이에 대한 측은지심 등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로봇이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을 거스르면서까지 움직였다는 말이 되고, 그게 기계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는 역설로 전달된다.
또한 폐기된 고철로 발견되는 아발론의 모습에서, 만약 아발론이 인간 조수였다면 그 죽음은 잘못하면 이 소설이 아이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조수에 대한 복수나 슬픔, 범인 추리로 빠져버리게 된다. 하지만 로봇이기 때문에 히데오는 하드보일드의 주인공 답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네게 검을 가르칠 수 있는 로봇은 단 하나지”라는 한 마디로 아발론에 대한 많은 것을 독자에게 전달하게 된다.
[경성과 숭례문, 그리고 시대의 은유]
“불타 없어진, 한 때 예를 숭상했다는 건물의 잔해”는 2008년 숭례문 화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것을 통해서도 이 ‘경성’이라는 곳이 일제시대의 경성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예(禮)’를 숭상하던 건물이 불탔다는 것은, 도덕,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가 무너진 세계를 상징한다. 히데오의 스승에 대한 서술을 보면, 스승은 바로 그 무너진 예의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경성이라는 공간 자체도 마찬가지다. 근미래와 식민지 시대가 겹쳐진듯한 이 가상의 도시는 혼란과 이중성, 위선 덩어리 자체다.
[‘아이가 싫다’는 말의 진짜 의미]
히데오가 반복하는 “나는 아이가 싫다”는 독백은, 소설을 읽으며 처음엔 그냥 흔하게 애들을 싫어하는 까탈스러운 아저씨 캐릭터인 걸로 보인다.
그러나 스승의 자택에서 와인 창고의 문이 열리는 순간, 이 말은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스승에게 어린 시절 ‘어떤 일'(알몸으로 방치되어 썩어가는 소년들에 대한 장면을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아동성폭행)을 당했을 히데오에게 ‘아이’란 단어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시간 그 자체다. 아이인 것이 싫었고, 아이였던 기억이 싫었던 것이다. 너무나 무력했기 때문에. 아이인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가 싫은 것이다.
히데오는 김 군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별다른 추리 과정 없이 곧장 스승의 저택으로 향한다. 그리고 와인 창고에서 “어설프게 숨겨진 작은 문”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발견하며, 스승의 멱살을 잡는다. 처음 온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 공간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움직인다. 스승이 그 안에 무엇을 숨겼는지도,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이미 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바로 스승의 집으로 향한 것은 탐정으로서의 직관이나 추리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으로 인한 필연이었다.
[아쉬운 부분]
분량이 짧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신영채가 스승의 아내라는 게 드러나는 부분이 좀 억지스럽다고 느껴졌다. 스승이 거기에 소년들의 시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어떤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아예 몰랐을까? 아니면 신영채 또한 스승의 범죄에 가담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찾으려고 했던걸까?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설명이 많이 미흡하다.
[마지막 문장의 결말]
“그리고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 히데오가 새로 거둔 구두닦이 소년일 수도 있다. 혹은 아직 ‘아이였던 시절’의 기억을 온전히 놓지 못한 주인공 히데오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소설의 제목은 이 마지막 장면과 연결된다. 어쩌면 아이와의 화해란 외부의 누군가가 아닌, 자기 안의 상처 입은 어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히데오는 의뢰를 완수했지만, 정작 가장 오래 기다리는 의뢰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자기자신과 온전히 화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