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장르에 로맨스 추가해주시죠(부제: 호러의 탈을 쓴 동양풍 고딕 로맨스) 감상

대상작품: 귀명실록 – 3. 붉은 거울 (작가: OriginCode,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3

[줄거리 요약]

 

 

[공포인 척하는 사랑 이야기의 시작]
이 소설의 첫 장면은 호러가 맞다. 달 없는 밤, 산골 공방에서 탈이 고개를 들고, 무당 옥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을 ‘얼굴을 흉내내는 귀면’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나서 독자는 알게 된다. 이것이 공포의 예고가 아니라 사랑의 예고였음을.

눈구멍은 비어 있었으나, 그 비어 있음이 방 안의 숨을 하나씩 빨아당기고 있었다.

이 문장은 공포를 주는 존재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로맨스의 원리를 예고한다. 비어 있기 때문에 빨아당긴다. 결핍이 곧 끌어당김이 된다. 귀면령이 완성되는 과정은 정확히 이 논리를 따른다. 그녀는 형상이 없었기 때문에, 윤휘의 감정을 흡수하며 그에게 가장 사랑받던 여인의 얼굴을 얻는다. 공포의 문법으로 시작한 첫 문장이 사실은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간절한 사랑의 원리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이 고딕호러를 만나는 방식]
서양의 고딕호러 로맨스는 특정한 문법을 가진다.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 이해할 수 없는 괴물, 그리고 그 괴물과 인간 사이의 금지된 인력 등등.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저주받은 존재이고,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은 지하에 갇힌 괴물이다. 그러나 두 서사에서 독자는 괴물의 편에 선다. 그것이 고딕 로맨스 장르의 핵심 쾌락이다. 끌리면 안되는 존재에게 끌리는 인간.

<붉은 거울>은 이 템플릿을 조선의 무속 세계관으로 번역한다. 폐쇄적 공간은 ‘귀령(鬼靈)의 뜰’이라 불리는 인적 끊긴 붉은 사막이고, 괴물은 귀면령이며, 금지된 인력은 죽은 자와 그를 잡아먹는 존재 사이의 묘한 유대다.

이 장르의 문법에서 ‘괴물이 인간을 닮아가는 과정’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위장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 즉 ‘사랑받을 자격의 획득’이다. 그림자가 조각을 흡수할수록 인간을 닮아가는 서사는 바로 이 문법을 따른다. 괴물은 인간을 닮아가야 한다. 외형이든 감정이든. 독자는 괴물=그녀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공포로만 읽을 수 없다. 어딘가에서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내가 요즘 인외 나오는 로맨스릴러를 쓰고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동시에 이 소설이 서양 고딕과 갈라서는 지점이 있다. 서양 고딕의 괴물은 대개 외부에서 주어진 저주를 지닌다. 그러나 귀면령은 윤휘 자신의 사랑이 불러낸 존재다. 괴물의 기원이 피해자의 내면에 있다는 이 구조는 한(恨)의 정서, 그리고 집착이 귀물을 만든다는 무속적 세계관과 정확히 맞닿는다.

 

[캐릭터와 서사 — 고딕호러비극 로맨스를 완성하는 장치들]
고딕호러 로맨스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감정이입할 수 있는 괴물,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인간, 그리고 결말에서도 해소되지 않는 애증.
이 소설은 이 셋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이 그 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은 단 하나의 축으로 수렴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되살리려는 남자의 욕망이 그 여자를 닮은 괴물을 탄생시키고, 그 괴물은 자신을 만든 남자를 끝내 놓지 못한다는 것.

그림자는 이 소설에서 가장 훌륭하게 설계된 고딕적 존재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했고, ‘혼백 조각이 모이면 새 형상이 태어난다’고 했다. 그 수혜자가 윤휘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정.직.한 기만’은 고딕 로맨스의 괴물이 가져야 할 핵심 자질이다. 언제나 그렇다. 마족이나 마물, 괴물들, 신들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단지 진짜 중요한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을 뿐이다. 악하지만 규칙이 있고, 파괴적이지만 일관성이 있다. 독자는 그 일관성 안에서 괴물을 이해하려 하고, 이해하는 순간 감정이입이 시작된다.

그녀의 형상이 완성되어 가는 경로는 더욱 결정적이다. 그림자는 처음부터 가희를 온전히 모방하지 않는다. 윤휘의 감정 조각을 하나씩 흡수하면서, 그 감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형상—윤휘가 기억 속에서 가장 사랑했던 얼굴—을 자연스럽게 닮아간다. 이것이 핵심이다. 귀면령은 가희의 복사본이 아니라 윤휘의 사랑이 빚어낸 조각상이다. 그녀는 가희가 아니라 윤휘가 사랑했던 가희의 이미지로 완성된다. 마치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그림자가 연민의 조각을 흡수하고 나서 처음으로 사람의 눈빛을 갖는 장면은 이 소설의 고딕 호러 로맨스적 정점이다.

<그대의 연민은… 따뜻했소.>

<그대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참 따뜻했지.>

(중략)

조금도 차갑지 않고, 조금도 작위적이지 않은… 진정한 인간의 눈.

(중략)

<그대가 흘린 감정들이… 나를 만들고 있겠지.>

이 대목이 공포로 읽히는가, 아름다움으로 읽히는가. 그 분기점이 이 소설 장르 정체성의 핵심이다. 소설은 이 장면을 서늘하게 쓰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게, 거의 감동적으로 쓴다(이런데 로맨스가 아니라구요? 아니 대사 하나하나가 다 로맨스인데?).

윤휘 역시 고딕 로맨스의 전형적 캐릭터이다. 그는 사랑 때문에 금지된 계약을 맺고, 경고를 알아채면서도 멈추지 못하며, 결국 괴물의 영역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딕 로맨스에서 인간이 괴물에게 끌리는 것은 납치나 강요가 아니라 언제나 일종의 자발성이다. 윤휘의 비극은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작은 언제나 같은 자리ㅡ사랑ㅡ에서 출발한다(당연하다. 로맨스니까). 그는 그저 가희를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가장 잔인한 것은 그 욕망의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윤휘가 가희를 살리려 한 사랑은, 결국 가희가 아니라 ‘가희를 닮은 존재’를 세상에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살아있는 사람의 혼을 빨아들이며 걸어간다. 사랑의 욕망이 낳은 것이 사랑의 대상과 그 자신조차 파괴하는 힘이 되는 이 역설이, <붉은 거울>의 고딕 로맨스적 비극의 본질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너무 사랑해서, 너무 오래 붙잡고 싶어서, 서로를 살리려 몸부림친 끝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삼켰는지도 알 수 없게 된 비극이었다.

소설 스스로 이 비극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죄도 벌도 아닌, 어느 쪽도 멈출 수 없었던 감정의 잔해뿐이다. 귀물을 가장 잘 아는 자들조차 이 사태를 ‘비극’이라 부를 수밖에 없을 때, 독자는 귀면령을 단순히 괴물로 단죄할 수 없어진다.

 

[이 소설이 진짜로 전하는 것]
사랑은 상대를 살리려는 의지이지만, 동시에 상대를 자신의 욕망에 가두려는 충동이기도 하다. 이 장르에서 그 두 가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제목은 <붉은 거울>이다. 그것은 거울이 지닌 이중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울은 대상을 비추지만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귀면령은 가희를 비추지만 가희가 아니고, 윤휘를 담지만 윤휘가 아니다. ‘그녀’는 사랑의 기억을 반사하고 동시에 먹어치우며 완성된 존재다. 그 붉음은 피이자 욕망이며,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될 때 배어나오는 색이다. 그리고 이 붉은 거울 안에 갇힌 윤휘의 처지는 고딕 로맨스가 언제나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질문을 가리킨다.

사랑받는 것과 소유당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일방적인 집착은 어떻게 파멸로 가는가.
(아앗… 갑자기 또 내 소설의 주인공들 누구누구가 떠오르고…).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서늘한, 호러로서의 반전은 그 소유의 방향이 뒤집힌다는 데 있다. 윤휘는 가희를 현생에 붙잡아두려 했으나, 결국 붙잡힌 것은 윤휘다. 사랑하는 여자를 되살리려는 욕망이 그 여자를 닮은 괴물을 만들었고, 그 괴물은 자신을 만들어낸 남자를 영원히 놓지 않는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가 욕망의 기원과 정반대 방향으로 완성된다. 이것이 이 소설이 고딕호러 로맨스의 문법을 가장 완벽히 반영한 지점이다. 괴물이 인간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괴물을 불러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다.

더 결정적인 것은 결말의 서술 방식이다. 소설은 귀면령이 “나를 위해 영원히 타오르시오”라는 선언을 한 직후, 곧바로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죽은 자의 이름이 아니라 끝내 사라지지 못하고 남은, 마지막 사랑의 조각이었다.

순수한 호러라면 이 결말은 절망으로 읽혀야 한다. 그러나 소설은 ‘마지막 사랑의 조각’이라는 언어를 선택했다. 공포가 아닌 사랑과 애도의 언어다. 귀면령이 윤휘의 이름 끝 한 음절—’…휘…’—를 영원히 놓지 못하는 것은, 지배이기 이전에 집착이고 집착이기 이전에 사랑이다. 가희를 닮아버린 괴물은 어쩌면 가희의 윤휘에 대한 마음도 닮아버린 게 아닐까. 소설은 그것을 공포로 끝내지 않는다. 사실상 마지막 문장 하나가 소설 전체의 장르를 결정했다. 이 소설은 호러 장르의 괴물 이야기가 아니라 끝내 놓지 못한 사랑 이야기였다.

 

[탈을 벗기고 나서 보이는 것]
<붉은 거울>을 호러로만 읽으면 뭔가 아쉽다. 공포의 밀도보다는, ‘애달픔’ ‘안타까움’으로의 감정 온도가 너무 높다. 그러나 동양풍 고딕호러 로맨스로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상당히 잘 만들어진 편이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탈 자체에 있다. 이 소설은 서양배경 일색인 고딕호러 and 비극로맨스 장르를, 무속과 귀면이라는 완전히 동양적 언어로 번역해 낸다. <오페라의 유령>이나 <드라큘라>를 보면서 괴물에게 감정이입하던 그 느낌을, 조선의 사막과 청동 주물과 혼백이라는 장치로 구현한다. 서양 고딕이 가진 성(城)과 지하실과 가면의 자리에, 이 소설은 귀령의 뜰과 청동 갑옷과 귀면을 놓는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고딕 로맨스 장르 안에서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질문 하나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괴물을 만든 것이 사랑이라면, 그 괴물이 저지르는 것도 사랑이라 불러야 하는가. 귀면령이 놓지 못하는 것은 윤휘라는 존재가 아니라 윤휘의 사랑이 남긴 온기다. ‘그녀’는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그것을 영원히 가두어야 한다. 이 구도는 섬뜩하면서도, 이상하게 슬프다.

이 소설은 호러라는 탈- ‘귀면’을 썼다. 그러나 그 탈 안의 얼굴은 처음부터 사랑 이야기였다.

이게 로맨스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로맨스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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