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메르 신화와 성경의 구약이 상당 부분이 겹치므로 인해서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유사성에 대한 부분인데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든 것이라던가, 노아의 방주, 바벨탑 등 수많은 부분에서 유사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수메르 신화가 그 바탕을 성경에서 취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오히려 성경의 탄생 배경이 수메르 신화에서 나왔다고 한다. 수메르 신화가 최초의 신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성경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란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수메르 신화와 성경을 합일시 한 관점으로 작품 중에 나오는 인물은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그의 짝과 아담이 아누에게 선물 받아 다스리게 되는 에덴 등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북유럽신화까지 곁들여 거인까지 등장시켜 거대한 신화를 바탕으로 한 한편의 로맨스가 재탄생해 ‘사랑‘이라는 주제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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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오빠 카옐의 비호아래 잔악한 짓을 서슴치 않으며, 흉한 외모를 바꾸기 위해 여신 발키리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 님프의 피를 짜고, 세이렌의 목을 뜯어내어 자기 것으로 취했다. 돌출된 뼈를 뽑고 깎으며 그렇게 누구보다 아름다워진 헬, 누구보다 잔인한 헬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잔혹함으로 셰올의 여왕이 되었으나 태어났을 때부터 혼돈에서 태어난 태초의 아버지 아누로부터 내쳐짐을 당한 상태이기에 그녀는 아버지 품에 한번만이라도 안기기를 바라는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원초적 결핍으로 인한 분노는 쌍둥이 오빠 카옐을 향한다.
어느 날, 아누는 자신과 닮은 아담을 창조하고 신들이 사는 천상의 섬 우벨과 비슷한 에덴을 꾸며 아담에게 다스리게 한다. 아담이 궁금했던 헬은 아담의 순수한 마음과 외모에 반해 셰올로 끌어들이고, 오빠 카옐은 늘 그랬듯헬이 관심을 보이는 아담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마르스, 벨리알, 그리고 아담까지 말이다. 왜 카옐은 헬의 연애사에 관심이 이다지도 많으며, 연애를 방해하는데 총력을 다하는 것일까. 헬에게 미움 받을까 전전긍긍해하며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내 머리를 관통한 문장이다.
“한 조각의 희망이 너무나도 찬란한데 내가 어찌 절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본문 중에서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 아누가 있었지만 아버지보다 중요한 사랑.
추하고 못생긴 본인의 외모를 혐오해서 내침을 당한 헬이 아누의 사랑을 받아보고 싶어 전전긍긍해도, 그런 헬의 마음조차 본인의 잘못이라며 감싸 안는 카옐.
자신을 창조한 건 아버지 아누가 분명함에도 본인을 이끌어 낸 것은 헬이기에 무조건인, 절대적인 사랑을 보이는 카옐.
보다 계획적이고 보다 치밀하지만 헬이 싫어할까 두려워함에도 최고의 복수를 꿈꾸는 카옐.
그것이 백년을 넘어 천년이 되어서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자신이 통치하는 아끼는 우벨이 몰락하더라도 그녀 하나만 있으면 되며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이 새겨지기만을 기다리는 카옐.
헬이 자신을 내치지만 않도록 오빠의 이름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녀 곁에서 자신을 잊지 않도록 애쓰는…… 안쓰러운 카옐.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온전한 마음을 얻기란 참으로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야.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은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
눈을 뜨게 해준 자가 눈을 멀게 했으니 어찌 발악하지 않을까.” ―본문 중에서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여인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절절한 매달림이었으며, 자신이 붙잡고 있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헬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고,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죽음 보다 더욱 큰 절망이었기에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그 눈동자에 자신을 오롯이 새겨지는 날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아누를 실체를 알고 그를 죽이라는 말을 듣고 응징하는 단 하나의 복수. 그것만을 바라보며 견디는 삶이었다.
“헬, 너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
지금까지도 짊어지고 있는 네 형벌은 내가 받아야 할 몫이었다.
전부 내 죄로 인한 결과니까 . 내가 너를 원해서 벌어진 일이거든.” ―본문 중에서
그녀의 눈동자에 아누가 아닌, 내가 새겨지기를.
장르 소설 중 로맨스 소설을 상당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작품의 탄생배경인 수메르신화와 북유럽신화, 그리고 수메르 신화와 성경의 동일시라는 걸 전제에 깔고 이 작품이 탄생된 것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익히 알다시피 수메르 신화는 태초의 신화라는 점에서, 성경은 최초의 인간 탄생 배경을 종교적 입장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대립각이 세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헌데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작품이라니.
살짝 걱정되었던 건, 그리스 로마신화만 하더라도 신화의 일부분을 소설화한 작품을 읽다보면 따분하고 지루하게 읽히기도 하기에 이 작품은 어떤 식으로 전개해 나갈까 하는 부분이었다. 소소한 걱정은 글을 읽기 시작과 동시에 단박에 날아가 버린다.
사실, 여러 신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들이 세계관만큼 넓기 때문에 스케일이 커서 초반 읽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부분 조차도 지루하기는 커녕 생생하게 각인되면서 글을 읽게 되는 흡입력이 있다.
한 단락 한 단락 읽어 나가면 다음 부분이 궁금하고 지난 글들로 인해 남은 부분이 줄어듦에 속상해져 버린다. 그래서 알게 된 카옐과 헬의 비밀과 사랑이 가슴 속에 절절이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내 이름이 무엇이고 어째서 살아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같은 본질의 뜻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잠만 잤을 때 그녀가 나를 깨웠어.
그곳에서 나를 꺼내 준 거야.” ―본문 중에서
다른 것은 보지도 못하고 절대적으로 하나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사랑. 혹은, 깨우치지 못하나 외면하지도 못하며 혹시 그 사랑을 인정하게 되면 사랑 하나만을 좇게 되리란걸 알기에 두려운 사랑.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작가는 치밀하고, 범 우주적이고, 태고적이지만 현재라도 매혹될 수밖에 없도록 잔혹하고 아름답게 그려나가고 있다.
영원한 우리의 화두는 ‘사랑‘이 아닐런지. 그래서 로맨스 소설을 읽게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 끊을래야 끊을 수도 외면 할래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다지도 맹목적이고 하나만 보이기에 더욱 가치 있고 인생을 걸만한 것이리라.
그렇다.
태초에 사랑이 있더라.
리뷰어 록흔 님
*서평 원문:
http://blog.naver.com/mayo1515/220520296734*록흔 님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는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