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를 잃어버린 협의 공모(비평)

대상작품: 천하독보(天下獨步) – 남겨진 자의 조건 (작가: OriginCode, 작품정보)
리뷰어: 나르디즐라, 2시간 전, 조회 7

1.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OriginCode님의 소설「천하독보 – 남겨진 자의 조건」(이하 천하독보)은 무협 소설입니다. 스토리는 무명검존이라는 인물이 천하제일인이 된 후, 그가 남긴 천하독보록이라는 비급이 보물처럼 잠들어 있다고 알려집니다. 이를 온갖 굴욕을 겪어도 생존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백운이, 사건에 휘말려 우연히 얻게 된 후 고독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천하제일인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하며 무협 파트는 끝이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일들은 사실 문예창작학과 수업을 듣는 공대생이 인위적으로 만든 ‘세계’임이 밝혀지며 반전을 제시합니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학우들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세계의 흐름을 개변한 것에 대해 폭력적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수업은 계속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노이즈가 낀 후 백운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3.

무협은 무와 협의 작품입니다. 무는 곧 무력을 뜻하고 자력구제의 힘을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협은 의협심을 뜻합니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협의 의미는 시대별로 다소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무협 소설은 가상의 중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문파들이 공통된 설정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치 판타지 소설처럼 특정한 코드를 요구하고 그것을 충족해야 무협 소설로 소비될 수 있습니다.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천하제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OriginCode님의 소설 천하독보에서, 먼저 무를 다루는 관점은 독특합니다. 천하제일인의 부질없음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안티테제처럼 기능하며 소설에 색다름을 부여하는 원천이 됩니다.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천하제일인이 갖는 가치는 뭘까요. 이는 사실 강함에 대한 추종이라기보단,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입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즉 천하제일인은 성공이라는 목표로 포지션되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동일시하여 스토리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이지요.이 때문에 무와 더불어 협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주인공과의 동일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협에 의한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무협에서의 도덕적인 기준이 강자존에 가깝긴 해도, 협에 의해 규율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소설 「천하독보」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안티테제적으로 접근합니다. 대부분의 무협 소설에서, 주인공은 특정한 문파에 소속됩니다. 문파 자체에서 무의 성격과 특징을 계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백운은 문파에 소속되기는커녕,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삼류 무림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노력하는 것 보단 살아남는 것에 집중합니다. 쥐새끼라고 불릴지언정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물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진짜 진의라기보단, 환경에 의해 길러진 천성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런 그가 기연(?)을 얻어 천하제일인이 됩니다. 바로 아무도 없는 무림 세계로 전이 되면서요.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천하제일인은 당연하지만 부질없습니다. 즉 자신밖에 없는 세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강한들, 의미는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여타 소설이 그러하듯, 혼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무협이기에, 강함이라는 것은 결국 상대적이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이는 무협이 ‘무’로만 구성되지 않고 ‘협의’도 같이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협의는 결국 개인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성을 통해 드러납니다. 홀로 오롯이 무를 추구한다고 한들, 그것은 협이 아니기에 무협소설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이 무협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엄연히 백운의 협이 안티테제적으로 드러나니까요.)

그리고 소설「천하독보」는 SF로(!) 건너뜁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민준이라는 공학도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진 일인 겁니다.

만들어진 이야기는 문예창작학과 학우들에게 맹렬하게 질타받습니다.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고 망가뜨렸기 때문입니다. 민준에게 협은 중요하지 않았기에, 무협 장르의 스토리인 해당 이야기의 완성도는 유예 됩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일들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협의 부재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은 무협이되 무협이 아닌 소설로 정립될 수 있습니다.「천하독보」가 무만 존재하고 협이 없음에도, 역설적으로 무협 소설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4.

단편소설에서 반전은 중요합니다. 짧은 글 속에서 강한 인상을 주는 수단이자 주제가 형상화되는 구간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천하독보」의 주제 형상화는 기존의 스토리를 부정함으로써 기능합니다. 그리고 이 부정이 의미 있는 까닭은 스토리 자체적으로 안티테제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통상의 부정은 비극의 스토리에서 다뤄집니다. 그리고 부정 이전에 ‘기승전’ 파트에서 긍정적인 부분들을 쌓아 올립니다. 추락하기 위해서는 일단 높이 올라야 합니다. 단차가 크면 클 수록 충격과 재미는 커집니다. 그런데 소설 「천하독보」에서는 반전이 두 번 이뤄집니다. 그리고 추락을 위한 단차가 그리 크지도 않습니다. 백운이라는 사내의 삶은 추잡하고 기구합니다. 그렇기에 굳이 상승이라고 봐줄 수 있는 것은 비급을 우연찮게 얻었을 때 말고는 찾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설에서 구가되는 반전은 추락으로 형성되기 보단, 관점을 뒤집어서 반전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통상의 비극은 낙차에 의한 충격으로 슬픔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지만 소설「천하독보」스토리는 아이러니에 가깝습니다. 물론 홀로 세계에 남게 된 자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생길 수는 있지만, 이 과정이 누군가의 실험이었으며 오만이었다는 점에서 냉소와 비웃음에 가까운 감정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장르가 소설의 스포일러가 되는 기묘한 부분도 드러내게 됩니다.

 

5.

결론적으로 소설「천하독보」는 아이러니적인 스토리를 무협의 협을 배제함으로써 구성합니다. 이는 통상의 무협에서는 보기 힘든, 단편 소설이기에 보일 수 있는 반전입니다. 이 기지 넘치는 반전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이뤄짐으로써 소설은 독특한 스토리적 쾌감을 선사합니다. 그렇기에 장르 자체가 스포일러가 되는 특이한 지점도 같이 보유하게 됩니다.

통상적인 무협에서 다른 장르를 가져와 접붙여 독특한 맛을 내는 소설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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