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후의 세계에 대해 고민하는 책이 몇년 사이에 많아졌다고 느낀다.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질문을 처음 마주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김성모 작가의 작품 중 하나에 이런 대사가 있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 피할 수 있는 것이지만,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라 피할 수도 없는 것이라네.” 그러니까 그 질문은 나에게 있어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었다.
<도플갱어 빚쟁이(2008)>는 직후에 읽었던 같은 작가의 <박애로부터의 자유(2008)>와 함께 그런 면에서 상술한 질문에 대해 SF적 대답을 보여주고 있다. 실은 ‘채권자가 채무자를 복제해서 빚을 빨리 갚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나 또한 18년도에 생각해 본 아이디어였다(그래서 더욱 빨리 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자본주의 다음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 속 미래에서 더 과장되고 기괴하게 변형된 풍자적인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를 그리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미 이 체제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SF가 되면 개인은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그 착취를 수십 또는 수백 배 부풀릴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개인의 인격은 지금보다 훨씬 더 무시된다. 그야말로 과장되고 기괴하게 변형된 자본주의다.
잠깐, 로봇이 일을 더 잘 할텐데 왜 인간이 노동을 하지?
그건 인간 본성의 사디즘 때문이다(이것은 나에게 있어선 통찰이 아니라 자포자기이긴 하다). 부르주아는 우월감을 충족하기 위해 로봇이 아니라 인간을 착취한다. 로봇이 모든 걸 다 해주면 소설로 쓸 게 없기 때문에 끼워맞추기 식으로 그렇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의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으면 나는 소설가가 아니라 학자가 됐을 것이라는 항의도 턱 끝까지 차오른다.
아무튼 이런 질문에 대해 두 작품은 나의 생각과 비슷하지만 다른 방향의 SF소설적 대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나보다 최소 10년 앞서서. 이 작품을 읽을 독자들도 이 점을 염두해 두고 읽으면 두 작품이 훨씬 재밌게 읽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