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키는 것’에 대해 감상

대상작품: 윤년(閏年)상실사건 (작가: Mano, 작품정보)
리뷰어: 유은, 2시간 전, 조회 5

안녕하세요 작가님, 항상 격조했다는 인사말과 함께 찾아왔는데 이번엔 특히 더 격조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었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핑계일 뿐, 제가 이곳을 찾아 글을 쓰지 않았던 것만이 진짜 이유이겠죠. 이유나 명분은 붙이기 나름이고 언제나 결과로 남는 건 행동이니까요. 그래도 내내 마음에 두고 생각하여 마침내 이렇게 다시 찾아오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 명분을 붙여가며 지내고 버텨낸 시간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이야기도 다른 방식으로 만났던 작품이네요. 처음부터 그 향기가 느껴져 뒤를 알면서도 즐겁게 기대하며 읽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후회’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사람이 살면서 한 번은 꼭 겪게 되는 감정. 동시에 다른 감정들과는 달리 언젠가는 꼭 떨쳐내야만 하는 감정. 제게 후회란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후회하고 있다는 것은 시선을 과거에 두고 있으며, 동시에 아직 극복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은 상태라고요. 후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감정 그 자체보단 극복을 위한 도화선이나 스위치처럼 여기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작품 속의 진 박사가 버텼던 28년을 제가 감히 그렇게 평할 수 있을까요? 고작 10분. 진 박사는 결함이라 칭했지만, 그것을 몰랐던 자신의 책임이 가장 중대하다 말했지만, 사실 그건 사소한 문제에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우연들이 겹쳐 탄생한 비극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기간테스가 타이탄의 뱀을 수집했던 공간을 마지막으로 실종된 것과 타이탄의 뱀이 크로노스의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지닌 시간(중력)의 왜곡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결과적으로 함선에 영향을 미쳐 실종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지요(어쩌면 뱀이 불안정한 시공간의 구멍 같은 것을 메꾸고 있었던 걸지도요).

그리고 진 박사의 이런 깊은 후회와 자책에서 저는 참사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 날 아침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더라면, 쉬라고 했더라면, 전화를 걸었더라면, 데리러 갔더라면….

어느 누가 감히 이 후회를 극복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기억하고, 두 눈에 담아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후회를 기꺼이 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진 박사의 28년을 저는 온전히 상상할 수 없지만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고 살아가는 와중에도 과거와 관련된 편린을 마주하는 그 순간순간마다 다시 무너지고 무너지길 반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킬 수 있다면, 되돌릴 수 있다면 뭐든 할 텐데. 또, 그때 좀 더 잘 했어야 했는데.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그 모든 간절한 외침은 과거를 향하고 있었겠죠.

하지만 인간은 과거를 돌이킬 수 없지요.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지만, 만일 그를 전혀 알 수가 없을 때, 어떻게 해도 불가능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두 눈에 담아두고, 잊지 않으면서도 나아가고 싶다면.

놀랍게도 방법은 있습니다.

정말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도, 아무리 긴 세월이 들더라도,

그럼에도 충분할 만큼, 내가 버텨낼 수 있는 만큼,

‘돌이키는 것’.

인간은 괴로울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원망을 다른 존재에게 쏟아내곤 합니다. 진 박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거에요. 타이탄의 뱀이 아무리 귀중하고 유효한 상징이라고 한들, 그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윤의 죽음을, 실종을 발생시킨 것이니까요. 가지고 빠져나갈 정도로 공을 들일 정도였다면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는 건 훨씬 더 손쉬웠겠죠.

하지만 진 박사는 그 대신에 뱀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이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원망스럽다면 원망스러울 수 있는 이 작은 생명체를 과거 자신의 호기심을 원래 장소로 되돌리기로 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의미가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엔 남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에겐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으니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돌이킴’들, 즉 ‘후회’처럼요.

후회 속에서의 우리는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를 고치고 덧대고 메꾸고 바꿉니다. 현실에서의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내내 그것을 끌어안고 있느라 나아가지 못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동시에 나아가고자 하는 힘 또한 후회에서 옵니다.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면, 그와 똑같은 순간이 또 온다면.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과거를 수없이 돌이켜 후회해본 자만이 단단히 세울 수 있는 결심.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저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후회를 지니고 계실 사고와 참사 유족분들이 그 누구보다도 앞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애쓰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은 아닐까요.

필요한 만큼,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후회하고 그를 위해 움직이는 것. 어쩌면 크로노스가 기간테스의 실종된 10분을 지워낸 것은 그저 자신의 가족을 돌려줬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 박사의 행동에서 그 말에서 지독할 정도로 짙은 후회를, 그 진심을 보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걸,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할 사람이라는 것을 진 박사에게서 보았기 때문에.

실종자들이 돌아왔으니 진 박사의 개척 위원회 자리를 위협할 명분은 사라졌습니다. 개척의 호기심을 넘어선 후회를 간직한 진 박사는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동시에 이 일 자체를 지키겠죠. 물론 후회했던 것처럼 은퇴하고 영윤과의 시간에 더 자신을 쏟을 수도 있을 것이고요. 어느 쪽이든 같은 일은 결코 반복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이야기 너머의 저는 믿습니다.

최근에 과거의 후회를 다시 마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그 직후 이 이야기를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제가 상황에 가깝다고 여겨 멋대로 그렇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작가님의 이야기는 제게 격려와 힘이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늘 건강히 손목 조심히 건필하시기를. 다음 이야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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