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미래와 재이는 제주도 신덕리의 셰어하우스를 찾는다. 미래가 블로그를 통해 동경해온 ‘길리와 꾸따’ 부부—낭만적으로 세계를 떠돌다 제주에 정착한 이상적인 커플—를 직접 만나기 위해서다. 결혼생활에 지친 미래는 재이에게 “이렇게 사는 부부도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블로그는 사실상 사라졌다. ‘길리와 꾸따의 세계살이’는 ‘길리의 제주살이’로 바뀌었고, 모든 여행 기록이 삭제되어 있었다. 꾸따는 보이지 않았고, 길리는 혼자 국수 가게 준비를 위해 창고를 개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헤어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점점 이상한 정황들이 드러난다. 재이가 한밤중에 창고에서 목격한 길리의 일그러진 표정과 “내 탓이 아냐”라는 중얼거림, 뒷마당 상자에 쌓인 남자의 옷과 신발, 카메라, 침대 밑에서 발견된 ‘푸껫에서 온 여자 다이빙 강사’의 흔적들. 편의점 주인의 말—꾸따가 와인을 사러 왔었다는 것. 분명 길리는 ‘우리는’ 와인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퍼즐 조각들이 맞춰진다. 꾸따는 한 달 전 이 집에 머물던 여자와 바람이 났고, 길리와 헤어지고 태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떠나는 날, 길리는 미래와 재이에게 다이빙 칼 두 자루를 선물한다. 하나는 칼집이 있고, 하나는 없다. “그런 일은 생겨. 누구에게나”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다이빙 체험 강의에서 미래와 재이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달 전, 신덕 해변에서 남자 다이버가 폐그물에 걸려 죽었다. 발견 당시 그는 손에 ‘빈 칼집’을 쥐고 있었다. 자신의 칼을 잃어버려 탈출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신고자는 ‘함께 다이빙하던 부인’이었다.
둘은 거의 확신하며 추측(상상)한다. 길리는 꾸따를 죽이지 않았다. 단지 구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폐그물에 걸린 꾸따가 칼을 찾을 때, 버디로서 십 년 간 관성적으로 내밀어왔던 그 손에, 이번만은 칼을 건네지 않았다. 2분간,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칼집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미래와 재이는 증거인 칼들을 휴지통에 버리고 황급히 떠난다. 길리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잊지 마, 그런 일은 생겨. 누구에게나.”
2. 핵심 사건
이 소설의 핵심 사건은 직접 드러나지는 않는다. 독자는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의 상상/재구성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냥 구해주지 않은 거였다. 버디니까, 부부니까, 십 년간 관성적으로 내밀어온 그 손에 이번엔 칼을 건네지 않은 것뿐이었다.
호흡이 허락하는 2분간, 그냥 지켜본 것뿐이었다. 그의 눈빛이 확신에서 의혹으로, 그러다 공포로 바뀌는 생사의 과정을 그토록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두 팔을 휘적대는 그와, 손아귀에 움켜쥔 칼집이 텅 비어 있음을 턱턱 차오른 숨 끝에 발견하고만 그 표정까지도, 그녀는 남김없이 지켜보았을 터였다.
길리는 꾸따를 죽이지 않았다. 칼로 찌르지도, 그물에 밀어넣지도 않았다. 그저 칼을 건네지 않았을 뿐이다. 굳이 지칭하자면 ‘구조 의무의 방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물 속이라 의도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당황해서 자기 칼도 찾지 못했어요. 시야가 나빴어요. 제가 건네려 했는데 상대가 보지 못했어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길리는 완전 범죄를 저질렀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범죄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행위로 복수를 완성했다.
3. 소설이 말하려는 것
이 소설은 관계에서의 권력 불균형을 다룬다. 블로그에 올라온 문장들은 모두 끝이 통일돼 있었다. ‘…하기로 했다’고. 그건 합의된 의지였을까, 아니면 길리 혼자만의 것이었을까. 꾸따는 누구인가. 무엇을 원했던가. 꾸따는 수동적이었다. “길리라는 수채화의 물 번짐과도 같은 존재.” 길리의 결정을 따라갔을 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삶이 싫어지자, 떠나려 했다. 심지어 이 리뷰를 쓰는 필자에게도 해당된다. 남편은 수동적이다. 대부분은 금전권을 쥔 필자가 결정한다. 그러나 미래의 반응은 단순한 공포나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길리를 이해한다. 그녀의 녹슨 칼이 속삭였다.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매일같이 블로그에 들락거리고, 친구를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오고, 궁금해하고, 염탐하고, 침대 밑을 들춰보면서. 징그러울 만큼 알고 있잖아. 너흰 다 이해하잖아. 이것은 미래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길리를 이해한다. 십 년을 함께 산 남자가 한 달 만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은 프로필을 가진—푸껫에서 온, 요가를 하는, 다이빙 강사—여자와. 게다가 ‘돈 문제’도 있었다. 빚을 내 집을 샀고, 아이를 계획했고, 안정적인 삶을 꿈꿨던 길리. 하지만 꾸따는 여전히 떠돌고 싶었다. 그래서 목공소 일을 하면서도 불만이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여행자 같은 ‘그 여자’를 만났다. 미래는 안다. 배신당한 여자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자기 인생을 걸었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았다는 허무함. 계획했던 미래가 산산조각 나는 절망.
이것은 많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한쪽은 진심으로 투자하고, 다른 쪽은 편하게 따라간다. 그러다 더 나은 옵션이 생기면 떠난다.갑자기 섬뜩해졌다 ㅋㅋㅋ칼은 내가 쥐고 있는데 왜 무섭지
길리에게 가장 모욕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함께 한 십 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길리는 언제든 대체 가능했다는 것.
모든 걸 해줬는데 자신이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모욕적인지, 미래는 이해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자가 남편에게 대체가능한 존재는 아닌 거 같아서 조금 다행인 것 같다. 비슷한 프로필을 가진 사람이… 일단 한국엔 없을 것 같다…
미래가 블로그에서 본 길리와 꾸따는 편집된 버전이었다. 행복한 순간들만 선별적으로 올라온 이미지들. 미래는 길리의 블로그를 보며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했다. 마치 마약처럼. 자기 삶의 불만을 타인의 환상으로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 환상이 무너졌을 때, 그 아래 있던 것은 더 처참하고 공포스러운 현실이었다. 길리가 말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거 아니에요?”
하지만 실제 삶은 달랐다. 돈 문제로 다투고, 꾸따는 목공소 일이 싫었고, 길리는 더 안정적인 삶을 원했고, 둘 사이에는 냉전이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SNS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미화하고, 동경하고, 자신의 삶과 비교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미화해서 SNS에 올린다. 하지만 그 ‘완벽한 삶’은 대부분 환상이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 집을 사고, 아이를 계획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소고기를 사 먹고… 그저 그것이 길리가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꾸따는 평범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떠나려 했다.
여기서 평범함은 폭력이 된다. 길리에게는 꾸따의 거부가 폭력이었고, 꾸따에게는 길리의 요구가 폭력이었을 것이다.
누가 옳은가? 그건 판단할 수 없다. 둘 다 옳고 둘 다 그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배신한 쪽은 꾸따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남은 쪽은 길리다.
4. 중요 상징
칼은 이 소설의 핵심 상징이다. 바다에서 폐그물에 걸렸을 때 탈출하기 위한 생존의 도구이며, 관계와 신뢰의 표시이다. 버디는 서로에게 위험에 처했을 때 칼을 건네준다. 하지만 길리는 자신의 빈 칼집을 꾸따의 손에 쥐어주었다. 칼을 건네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던가. 하지만 이 소설에서 칼은 결국 그 ‘물’을 베어버렸다. 완벽한 관계의 단절. 십 년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물건(‘비어있는’ 칼집)을 길리에겐 칼-목숨을 구하기 위한 도구, 관계의 주도권, 이 관계에서 벗어날 힘, 그리고 꾸따에 대한 신뢰 ‘였던 것’ 이 있다. 꾸따에겐 없다. 나에겐 있고, 너에겐 없었다. 물론 표면적 의도는 꾸따가 자기 칼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있는 진짜 메시지는 “네가 찾던 건(그물에서 풀려나는 것, 또는 길리에게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려는 자유) 여기 있어. 하지만 이미 늦었지.”라는, 죽어가는 또한 길리는 미래와 재이에게 칼을 선물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걸려. 그런 일이 생겨. 누구에게나. 하지만 상징적으로는? 미래에게 길리의 말은 상당히 중의적으로 들린다. 잊지 마, 그런 일은 생겨. 누구에게나. 너희도 언젠가 이 칼을 사용할 날이 올 거야. 너희를 배신한 사람을 구해주지 않는 데.남편꾸따의 손에 쥐어줌으로써, 관계의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남편(아니지 참 결혼했다고 안했지) 꾸따에게 보내는 마지막 분노다.
표면적으로는 친절이다. 다이빙할 때 필요하니까.
길리는 꾸따라는 그물에 걸렸었던 건 아닐까.
바다는 자유와 감금의 이중 상징이다.
길리와 꾸따에게 바다는 자유였’었’다. 세계를 떠돌며 다이빙하는 삶. 하지만 제주에 정착하면서, 바다는 감금이 된다. 더 이상 떠날 수 없다. 빚이 있고, 집이 있고, 계획이 있다.
그리고 결국 바다는 꾸따를 집어삼킨다.
역설적으로 바다는 길리를 해방시킨다. 꾸따라는 짐에서, 배신의 고통에서, 불안정한 관계에서.
5. 진짜 반전
재이는 논리적(T) 탐정이다. 단서를 수집하고, 추론하고, 가설을 세운다. “길리가 어딘가 구려” “분명 뭔가 있어.” 그러나 여기서 반전은 길리가 범인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맨 마지막 장면에 미래와 재이가 증거를 인멸한다는 것이 진짜 반전이다. 탐정은 범인을 잡지만, 이 소설에서의 ‘탐정’들은 범인을 보호한다. 그렇기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어쩌면 이런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같은 편이야. 여자들끼리. 여자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일은 생길 수 있어. 배신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에 대한 복수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소설은 후자를 용인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이해한다.
미래는 감정적(F) 탐정이다. 길리를 동경했기에, 그녀를 이해하려 한다.
미래와 재이는 길리를 보호한다. 왜? 그녀가 여자이고, 배신당했고, “우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복수는 종종 히스테리나 광기로 치부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복수를 냉정하고 계산된 것으로 그린다. 길리는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이성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