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아주 오래된 공포를 떠올렸습니다.
마왕도 아니고, 드래곤도 아니고, 저주받은 던전도 아닙니다.
채혈입니다.
저는 병원 신세를 좀 진 적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가장 질색했던 것 중 하나가 혈관 찾기였습니다.
특히 작품 중반, 주인공이 점심 먹으러 간 사이 대타로 들어온 그 광기의 간호사 선생님을 보며,
저는 제가 실제로 만났던 몇몇 분들을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혈관이 잘 안 보이시네요.”
이 말이 들리면 이미 마음이 무너집니다.
보통 한 번으로 안 끝납니다.
두 번, 세 번.
그러다 손등이나 팔꿈치 아래쪽,
움직일 때마다 존재감을 주장하는 자리에 라인이 잡힙니다.
간호사 선생님도 힘든 게 보입니다.
저도 힘듭니다.
하지만 제 팔은 이미 전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의 용사들을 마음껏 비웃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작품이 아주 새로운 클리셰를 만든 건 아닙니다.
심약한 프리스트, 우악스러운 엘프 검사, 말없는 드워프 교관, 노래 부르는 바드, 이과 마법사, 왕까지.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 익숙한 용사들을 채혈실 의자에 앉혀놓는 순간, 전부 다르게 보입니다.
전투력이던 것이 채혈 난이도가 되고.
강인한 피부는 바늘도 안들어가고.
때와 장소를 안가리는 스킬 시전은 협조 불가 사유가 됩니다.
마력은 검사오류가 뜨는 원인들이겠죠.
용사님들은 마왕을 잡았을지 모르지만, 간호사는 혈관을 잡아야 합니다.
이 작품의 재미는 거기 있었습니다.
검을 든 용사도, 마법을 쓰는 용사도, 왕국을 구한 존재도, 채혈실 앞에서는 결국 환자입니다.
특히 포닥 하플링은 좋았습니다.
가난하고, 장비를 아까워하고, 공짜라면 일단 눈빛이 달라지고,
기왕 피 뽑는 김에 더 담아가면 안 되냐고 하는 태도.
이건 판타지라기보다 대학 연구실에서 나온 어떤 사람이었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판타지를 그렇게 좋아하는 독자는 아닙니다.
검과 마법, 용사 파티, 종족 클리셰가 나오면 괜히 책이 덮고 싶어지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좋습니다.
용사 파티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도 좋지만,
그 용사 파티가 채혈실에 앉아 팔을 내미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거창한 세계관이 작고 구체적인 현장과 만날 때,
이런 참신한 맛이 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 시대에 혈관 하나 자동으로 못 찾습니까.
인공지능이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자동차도 운전한다는데,
왜 제 혈관은 아직도 간호사 선생님의 눈과 손끝과 한숨에 맡겨져 있습니까.
왜 이런 고민을 아무도 안 해서 나를 그렇게 고통받게 했을까.
찾아보니 혈관을 비춰주는 장비도 있고, 자동 채혈 로봇도 개발되고 있더군요.
하지만 아직 모든 병원에서,
“띡. 혈관 확인.”
“착. 채혈 완료.”
이렇게 되는 세상은 아닌 모양입니다.
비용과 현장 운용 문제겠죠.
아마 채혈까지 해결하는 마법은 구현 난도가 높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전문 간호사인 것도 납득했습니다.
이세계에도 자동 채혈 마법은 없었던 겁니다.
결국 이 작품은 판타지인 척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왕을 잡는 일도 어렵겠지만,
협조 안 되는 팔에서 혈관을 잡는 일도 충분히 어렵습니다.
용사님들.
왕국을 구하셨다면 이제 팔에 힘 좀 빼주십시오.
간호사 선생님은 이미 충분히 전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