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라한이라고 항상 원망스럽지는 않다 공모(비평)

대상작품: 투명한 아침 (작가: 노르바, 작품정보)
리뷰어: 안병규, 58분 전, 조회 4

들어가기에 앞서…

예술은 결국 주관에 의해 감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리뷰는 객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결코 객관성을 띌 수 없습니다.

제게 예술은 경험을 전달하는 매체 혹은 행위, 따라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받았다면 저는 좋은 작품으로 지칭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성된, 지극히 편협한 리뷰임을 염두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 꼭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얼굴이란 무엇인가

과연 얼굴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자면, 이런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모 기업의 드러난 민낯’이라던가, ‘평범한 회사원의 두 얼굴’이라던가. 동시에 메신저나 전화 통화보다는,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는 편이 신뢰를 얻기에는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대부분이 그러실 거라고 겁니다. 이러한 이유가 뭘까요? 과연 얼굴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얼굴은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각화된 본질이죠. 너도 나도 확인할 수 있는.

얼굴이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며 작품의 도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자 ‘정서연’은 아침에 일어나 루틴대로 세면대의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짜잔! 얼굴이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머리 전체가 투명해졌죠, 이목구비와 머리카락의 감촉은 느껴집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머리를 잃는다면 신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연의 각 기관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죠. 그러니 더욱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서연은 집을 나서야 합니다, 오늘은 실적 보고를 발표하는 날이고 발표자가 서연 본인이기 때문이죠. 본질을 잃었음에도 부여된 역할은 다해야만 합니다.

서연은 출근 버스에 올라탑니다. 누군가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누군가는 프랭크(prank, 몰래카메라류의 장난을 일컫는 단어입니다)로 여깁니다. 하지만 결코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이상한 것들로 넘쳐나거든요. 서연의 이상 현상은, 타인에겐 그저 헤프닝 정도에 불과합니다.

 

흐릿해지는 본질

다시 얼굴이란 메타포로 돌아와 봅시다. 앞서 언급했듯 안면에는 개인의 본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관상학이라는 게 있을까요! 얼굴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얼굴은 언제나 사회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현대 사회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편입니다.

다소 난해할까요? 그럼 좀 더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기가 거듭될 때마다 시대의 흐름은 가속을 받아 왔고,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잠깐 멈춰서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속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처리해야 할 정보량도 너무 많습니다, AI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도 이러한 점이 주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인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할까요?

인간은 말하자면 다층적으로 축적된 정보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개인마다 기질과 성장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통합된 사회라고 해도 한 명의 성향은 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한 명의 인간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문단을 통해 얘기했듯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기에 급급합니다. 그런 와중에 고작 한 명을 향해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래서 우리는 첫인상이라는 정보를 통해 평가내립니다. 시각적인 정보야말로 가장 직관적이니까요.

아, 저 친구는 제법 유쾌할 것 같다. 저 사람은 진중하지 못할 것 같고, 저 사람은 좀 쎄한 느낌이 든다. 아마 다들 이런 경험이 있으시죠? 그리고 언제나 그게 정답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실 거고요. 결국 얼굴이라는 건 극히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보니, 너도 나도 많은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 빠른 시대 속에서 오류를 수정하기도 번거롭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본질은 점점 흐릿해지기만 합니다.

다시 서연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서연은 여전히 어엿한 회사원입니다, 동시에 사회의 화젯거리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괴한 괴물이며 의사에겐 실험용 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도 서연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고작 보이는 정보로부터 발생한 오류, 오류로부터 비롯되는 괴리, 그 탓에 서연은 불쾌함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空)을 실천한다면…

갑자기 공(空)이란 개념이 튀어나와 난감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작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님의 다른 작품인 ‘AI는 열반을 들 수 있는가’에서 공의 중요성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이야기에도 공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았나 생각하여 해당 개념을 적용시켜 리뷰를 이어나가 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서연이 겪는 난감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무면증의 원인을 의사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황. 얼굴의 어디까지 투명해졌을까, 이 상태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는 있을까. 서연의 불안함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죠. 실제로, 서연의 동료들은 예전처럼 그녀를 대하지 못하고, 그녀 또한 동료와의 식사 자리를 피합니다. 기인 정도는 수차례 봐왔을 법한 편의점 알바생마저 그녀를 진정한 기인으로 여깁니다. 따끔하다 못해 욱신거릴 법한 시선이 지속적으로 가해집니다.

그러다 저녁에 다시 들른 편의점에서, 알바생이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뭐, 그냥 손님이에요.’

여기서부터 서연의 심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서연은 괜히 피하던 동료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예전처럼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게 되죠.

다시 이야기의 도입으로 돌아가 봅시다. 서연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루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이 본질이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건 꽤나 이상한 일입니다. 자신의 본질을 구태여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명확히 알고 있다면 말이죠. 즉 서연은,

본인의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하여 외면에 의존하고, 집착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어느새 이야기는 끝에 다다랐습니다, 서연의 주변을 둘러싼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예 특이체질자라는 낙인마저 찍혔습니다. 그런데 서연은 예전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하다고 느낍니다! 시간 들여 화장을 할 필요도 없어졌고, 다른 사람들도 서연의 목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어졌거든요.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집착하던 것들을 놓아, 비로소 ‘정서연’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맞아요, 공을 실천한 겁니다. 서연은 얼굴, 사회적 요소를 포기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사회 속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정립한 자아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생활이 시작될 것임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마무리하며…

사회 속에서 시각적인 요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해당 작품은 얼굴에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사실 패션도 마찬가지죠? 과거에 의복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그런 것들이 사라진 현대에는 자신이 속한 문화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합니다. 같은 옷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비리거와 치카노 (멕시코계 미국인 갱단을 뜻합니다) 모두 면바지를 사랑하지만 한 쪽은 핏하게 입고 다른 한 쪽은 펑퍼짐하게 입습니다. 이렇게 보여지는 것으로 자신이 기반한 문화와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패션입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올해 초중반을 지배한 키워드 ‘퍼포머티브 메일’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각 문화의 요소를 가져와 ’마치 제 정체성이 그런 것처럼’ 겉을 꾸미는 남자들을 일컫는 용어죠. 썩 유쾌한 단어가 아님에도 꽤나 뻔뻔하게 사용되어서, 필자는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불편함을 느끼고 계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혹,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의식하고 품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때로는 과감하게 내치고, 마음 속에 자신만을 남겨두는 건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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