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겨울비(전혜진)], [내가 죽기 일주일 전(해차반)], [박하지 않은 경로대잔치(은상)], [생매장 여관의 奇異(정도경)] – 총 네 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1. 18세의 신여성 – 겨울비
“진명여학교를 나와 나이가 어린데도 소란스럽지 않고 그림처럼 단아”한 그녀의 이름은 [겨울비]에서 호출되지 않는다. 열여덞살의 그녀는 정신대 공출을 피해 윤창아재와 결혼후, 아재가 없는 아재의 집에서 살아가며 초당의 낡은 기둥에 뺨을 대며 중얼거린다.
그녀가 배꽃처럼 조용히 웃었다.
“제게는 친정도 없고, 근로 정신대에 끌려가더라도 막아 줄 사람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전 그래서, 지금에 만족해요. 살 곳이 있고, 굶지 않아도 되고, 읽을 책들이 있으니까.”
어린 그녀가 가져온 가방은 낡고 작고 가볍고 그녀는 언제나 “허황하고 차분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저 구두 신은 작은 발을 까딱거리며 혼자 뜻 모를 이국의 창가를 나지막히” 부른다. .
[겨울비]는 일제치하의 과거 조선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녀는 계속 조카인 ‘나’의 눈에 비친 소녀이고 조카가 맘에 품은 연심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상해에는, 나 혼자 갈 수 있”다고.
그녀는 상해로 갔을까. 살아서 해방을 봤을까. 무탈하게 노년이 됐을까. 아니면 진즉 죽었을까.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국가 폭력을 피해 결혼한 18세의 그녀가, 내 할머니 뻘인 그녀가 당시 어떤 노래를 불렀을지, 그녀의 눈에 비친 그때의 하늘이 어땠을지 조용히 상상해볼 뿐이다.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대한민국 여성이 등장하는 브릿G 소설로 와본다. 어쩌면 그녀의 손녀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녀의 환생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과거의 편린만을 공유한 존재일지도 모르며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그리고 여기에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의 김인주가 있다. “판판한 플라스틱 판 위로 붉고 선명하게 그어진 두 줄”을 보고는, 자신이 “그저 헛똑똑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김인주가.
2. 20대의 김인주
김인주는 지금 스물셋이다. 사랑을 했고 임신을 했는데 알고보니 남자는 유부남이었고 뒤이어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아이를 지우라고 돈봉투를 건넨다. “일단 김인주는 여주인공도 아니었고, 그녀의 상대 역시 재벌이긴 했지만 남주인공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은 캔디와 본부장님의 신분 차 나는 안타까운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스물 세살의 김인주는 이렇게 말한다.
“……제 의견은요?”
말하고 싶었다. 이것은 내 인생이고, 나에게도 생각과 의사가 있고, 선택할 권리가 있노라고.
(…)
그리고 카페를 벗어나 딱 두 걸음을 걸었을 때 그녀는 바로 후회했다.
그 봉투. 그냥 받을 걸.
미혼모의 길을 선택한 김인주는 5년이 지나 남자의 부인과 다시 만난다. 이번엔 아이를 넘겨달라는 부탁이며 이번엔 돈봉투가 두 개이다. 이제 김인주는 “얼마나 주실 수 있는데요?”라고 흥정할 정도로 연륜이 쌓였고 선금으로 알겠다며 돈봉투 두 개를 챙긴 후 아들과 함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도망쳐 도착한 낡고 오래된 주공아파트의 평화로움에서 깨닫는다.
인주는 문득 깨달았다. ‘람우 엄마’, 맞지. 그런데 그 이전에 자신은.
“김인주예요.”
김인주였지.
시간이 흘러 아들은 아프고 그녀는 간병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여타 통속극이라면 적이 되었어야 할 사람과 우정을 나누게 된다.
누군가 지금 자신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아픈 아들을 팽개치고 남의 돈으로 사치나 부리고 다니는 미친 여자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라며 비난하겠지. 어떻게 저럴 수가, 인간도 아니다, 엄마가 저러면 안 되지, 애 엄마라는 사람이 말이야.
그래서 뭐.
그들 중 누가 자신의 마음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자신의 삶을 돌봐줄 수 있나.
그녀는 병원으로 돌아가, 아들 옆에 간이침대를 펼쳐놓고 오랜만에 아주 깊이 잠들었다.
깨어났을 땐 머리가 맑아져있었다. 비로소, 머릿속 악마가 물러났다.
병원에 붙어 살던 인주가 짬을 내어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떼우고 있을때 어쩌면 옆 자리에는 ‘희’가 앉아서 칼국수를 먹고 있었을지 모른다. “곧 마흔이 되어 가는 나이. 회사에서는 악착같은 여자 직원에게 흔히 붙는 별명인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당당한 희”가.
3. 30대 후반의 ‘희’
고졸계약직을 거쳐 금융회사의 정규직이자 팀장이 된 희는 칼국수나 한 그릇 먹자고 식당문을 연다. 그곳에서는 [박하지 않은 경로대잔치]가 열리는 중이었다. 희는 왠지 주인 할머니의 말을 거절하기가 싫어 “영업을 하며 갈고닦은 미소를 띠며 마루로 올라”서서는 노인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신다.
희는 언제나 명함을 뿌리고 다녔다. ‘대출이 필요하면 연락만 하세요.’ 희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아가씨가 필요하면 입구에서 이만기를 찾으세요, 라고 말하는 삐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게 그녀의 이름이다.
“희…… 라고만 불러주세요.”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떠랴. 내가 직접 지은 것도 아니고, 부모가 지어준 것도 아닌데. 그저 ‘희’가 된 희는 그저 천상의 막걸리가 된 술을 미간을 찌푸리며 들이켰다.
천상의 막걸리를 들이키던 희는 취한다. 취한 희는 “자기가 미소를 짓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볼에 손을 댔다. 미소가 버릇이 될 정도로 희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입양이 되지 않은 고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고, “희는 꿀벌처럼 일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던 희는 어떤 일로 화를 낸다. 미소가 습관이라 음주 중에도 미소를 짓고 있는지 볼을 만져 확인하던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화를 낸 것이다. 그녀의 업무용 마스크가 잠시 깨진다. 그 정도로 화가 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는 “더 화를 내려다” 만다. 어쨌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날 마흔이 된 희는 정규직으로 일하는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사표를 집어던지고 마그네슘 워먼이 되거나 아니면, 또 어쩌면 휴가 기간 중 생매장 여관에 들를지도 모르겠다.
4. 40세의 마그네슘 워먼
사십 번째 생일, “수시로 위통에 시달린 끝에 속 쓰림에 좋다는 마그네슘 영양제를 해외직구로 구입했으며 영양제를 먹은 뒤에 마그네슘워먼”이 된 그녀는 “위풍당당하게 머저리 회장의 면상에 사표를 집어 던지고 회사를 뛰쳐”나와서는 “자유와 행복의 유토피아를 찾아 정처없이 길을” 가던 중 <생매장 여관>에서 누군가를 해부하려는 외계인들과 마주친다.
그녀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어쩌고 뭐 그런 비슷한 구호를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마그네슘워먼으로서 딱히 정해 놓은 구호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자신이 아는 언어 중에서 대략 가장 외계어 비슷한 것을 우선 외쳤다.
“Здравствуйте! 죄 없는 지구인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 사람을 놔줘!”그녀가 다시 외계인들을 저지하려 했을 때 수술대에 누워 있던 지구인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고는 짜증을 내며 외쳤다.
“아줌마는 뭐야! 가서 남자 불러와!”
그래서 그녀는 우주인들이 성차별주의자를 해부하도록 내버려두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남자/여자’ 식의 표현으로 성별을 밝히지 않고 ‘지구인’이란 단어를 썼다.)
마그네슘 워먼은 생매장 여관에서 괴이한 일을 겪으며 미남 배달꾼을 포함한 여러 생명체와 만나고 함께 축제에 갔다가 “생매장 여관 666호에 누워 마그네슘 영양제를 먹으며 앞날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마그네슘 워먼이 묵은 생매장 여관의 수많은 다른 방에는 희가 묵고 있을지도 모르고 인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순간 영양제를 먹고는 마그네슘 워먼이 되어 그녀처럼 모험을 떠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모험의 길에서 우리는 만나고 깨닫고 잠깐 함께했다가 다시 각자의 길을 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등 대고 누운 곳이라면 어떤 곳이던 생매장 여관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많은 ‘어쩌면’과 ‘모른다’를 사용한 이 리뷰는 여기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