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미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본문.P584)
목차
1.『사키 사노바시(さきさのばし)?』
2.『우리는 괴담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본 리뷰는 “윤주안”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사키 사노바시(さきさのばし)?』
‘사키 사노바시(さきさのばし)’라는 제목을 들어보셨나요?
그것은 어느 커뮤니티에서 유래된 경험담에서 비롯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저들은 ‘인터넷에서 발견한 가장 정신 나간 것이 뭐였어?’라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유저가 자신이 발견한 ‘애니메이션’ 영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 알몸의 소녀들이 문도 없는 커다란 화장실에 갇힌 채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을지 논쟁을 벌이는 이상한 애니메이션이었어. 모두들 희망을 잃은 뒤 파멸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소리치기 시작했지.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목을 쥐어뜯으며 자살하고. 화질은 80년대로 보였어. 일본어 음성에 영어 자막. 약 30분 분량. 크레딧은 없었는데 소실된 것 같았어.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어.
요점은 ‘소녀들이 화장실에 갇혀서 자살하는 80년대 풍의 애니메이션을 봤다’라는 것인데, 이에 관해서 다른 이가 ‘자신도 그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주장하며, 그 제목이 ‘사키 사노바시(さきさのばし)’라고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는 특유의 어둡고 자극적인 내용과, 실존여부가 불분명하다는 미스터리함, 더 나아가 ‘사키 사노바시’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본어식 제목이 큰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하며, ‘로스트 미디어(Lost Media)’를 대표하는 괴담 중 하나로 뽑히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사키 사노바시: 절망 그 끝의 미래>는 이런 ‘사키 사노바시’ 괴담을 바탕으로 창작된 소설입니다. ‘괴담’을 다루는 인터넷 방송인이 관련 이야기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으며, 괴담 그 자체보다는 ‘왜 이 괴담이 탄생했는가’에 대한 비화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형식적으로는 관련 취재 영상을 텍스트로 옮겨놓은 듯한 구성 덕에, 영화로 따지면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와 같은 질감을 풍기며 독자들과 거리를 좁히는 구성이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실존이 입증되지 않은 괴담이 어떻게 재해석되었는가를 살펴보고, 괴담에 흥미를 갖고 이 작품의 독자가 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고려해볼까 합니다.
2.『우리는 괴담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앞서 말했듯이, ‘사키 사노바시(さきさのばし)’는 실존이 입증되지 않은 괴담입니다. 그런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주장하는 목격자만이 있을 뿐, 그 애니메이션의 실체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그 실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 타당하지만, 오히려 그런 가려진 부분에서 오는 으스스함이 이 괴담을 쫓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필수적으로 이 가려진 부분들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거치게 됩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체불명의 영상물’이 아닌, ‘실존하는 사건’으로 전제를 두며 시작하는 덕분에, 이 괴담에서 느껴지는 결이 사뭇 다르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로 인해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는 후술하겠습니다.
(P.6) “1980년대 일본에서 발생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미제사건. 좁은 공중화장실에 감금된 여자아이들이 점점 광기에 휩싸여 자해하고, 결국 참혹한 결말을 맞는다는 내용이죠. 하지만 그 사건은 존재 자체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원본이 되는 괴담과 가장 큰 차이는 ‘사키 사노바시’가 ‘애니메이션’이 아닌 ‘소문만 무성한 미제사건’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사건의 존재 자체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데에 비해, ‘미제사건’이라며 관련 조사가 이뤄졌다는 식의 언급이 다소 모순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찌되었든 이 작품은 ‘괴담의 실존’이 아닌 ‘사건의 실존’을 다루겠다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P.8) “그런데 말이죠. 최근, 저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1986년 일본에서 실제로 ‘화장실 감금 사건’이 발생했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을 숨기고 살아왔습니다.”
(P.14) “생존자의 이름은 타케다 유미. 사건 당시 17세였고, 현재 50대 중반입니다. 그녀는 사건 이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사라졌어요.”
이 사건의 실존은 갖은 요소로 더욱 구체화 됩니다. 1986년이라는 시대상을 추측할 수 있는 시기를 제시하고, 일본이라는 배경과 ‘타케다 유미’라는 사건중심에 있던 인물 제시에 다다르니, ‘사키 사노바시’라는 괴담과의 연관성은 ‘화장실에 감금되었던 여고생’이라는 아주 가느다란 기본 줄기에 그치는 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괴담’은 씨앗에 가깝습니다. 이 ‘타케다 유미’라는 인물이 겪었던 사정과 과오를 제시하기 위한 뿌리라는 뜻이겠죠. 즉, 이 작품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형태가 없는 괴담의 구체화 보다는, 해당 괴담에 대한 발상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P.354) “그날 이후, 우리가 기억하는 미나가 누구였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P.360) “그 애는… 우리 기억 속에 있는 미나가 아니었어요.”
화자는 이 ‘타케다 유미’라는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가 겪었던 사건 뒤에 ‘미나’라고 불리는 동급생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P.378) “1985년, 미나는 이 학교에 다니던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P.382) “… 나는 투명인간이다.”
(P.383) 아무리 말해도, 아무리 도망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이곳에서 사라지면… 누군가 나를 기억해줄까?
(P.389) “미나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죽은 후, 학교는 사건을 조용히 묻어버렸다.”
미나는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자살했던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제 삶을 자각하고 있었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최후의 선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죠. 하지만 죽음으로 기억되리라는 바람이 무색하게, 학교는 그녀의 죽음을 은폐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미나는 동급생들과 학교라는 환경에게 철저히 배제당하고 지워진 셈입니다.
(P.414) ‘미나는 우리를 벌한 게 아니에요. 그냥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P.419) “어쩌면, 그녀는 죽어버린 후 귀신이 되어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지우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유미와 동급생들이 화장실에 갇히고 기현상에 고통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증언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살한 여학생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친구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전형적인 괴담의 형식으로 비춰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발상’은 점층적으로 확장됩니다. 그 키워드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역사’로 연결됩니다.
(P.591) “너희는 나만 지운 게 아니라고. 너희는 나 같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워왔다고.”
일제강점기 시기의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주제가 무척 익숙한 편입니다. 당장 교과과정에서도 큰 비중을 다루고 살펴보는 대목인 만큼, 당시 식민지였던 나라의 애환과 국민들이 겪은 고통은 머릿속에 충분한 사전지식으로 각인되어 있죠.
(P.596) “미나만이 아니었어요.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 되찾을 수도 없는 고향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 일본은, 우리는 그들을 잊으려고 했어요.”
이 작품에서 ‘미나’라는 인물은, 말 그대로 당시 일제에게 희생당하고 은폐되었던 한반도 국민에 대한 역사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비유’라고 표현한 것은 그녀가 ‘재일교포’라는 설정 하나로는 이 역사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인물로 묘사되기에는 비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발상과 결론은 나름 인상이 깊은 편입니다. 조선적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학급 내에서 학대를 받았던 ‘미나’의 사정은 ‘학교폭력’이라는 익숙한 키워드로 독자들에게 이미지화가 되기 쉬운 쪽에 속합니다. 그런 폭력은 곧 일본이라는 나라가 식민지 국민에게 강요했던 ‘폭력’과 결을 같이 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며, 한 나라의 국민들이 ‘폭력’으로 희생되고 은폐된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P.584) “지금도… 미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과연 현대 우리는 ‘미나’처럼 한 시대에 희생당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작가의 마지막 물음에 작게 동조를 구겨 넣으며, ‘괴담’으로부터 시작된 발상이 ‘역사적 희생’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사키 사노바시: 절망 그 끝의 미래>의 감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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