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의욕도 의지도 잃어버리고 흘러가는대로 살던 주인공이, 이유없이 어떤 대상에게 빠져들고 집착하게 되는 대조가 훌륭한 긴장감을 줍니다. 아니, 빠져든 이유라면 있네요. 바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천상의 맛을 지닌 나무열매의 과육입니다. 그 점이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고, 미스테리도 각인시키므로 초반부터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중반에 원영과의 관계가 서술되면서 점차 이야기가 하나의 비유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인공은 원영과 입맞춤까지 나눈 사이지만 이제와 애써 관계 형성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일이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지레 두려워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는 거죠. 머뭇거리기 위하여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투의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그때의 입맞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일의 다시없는 환상의 맛이 대구를 이룹니다.
주인공은 원영은 떠나보냈지만 나무열매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그 맛을 보기 위해 씨를 틔우고 13번이나 분갈이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종내엔 그의 관심을 먹고 쑥쑥 크는 나무에 사랑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자기 이름을 따서 붙인 순이라는 나무를 사랑하게 된 남자. 현실과의 괴리와 긴장감은 점점 심해집니다.
그때 완전히 떠난 줄 알았던 원영에게 연락이 옵니다. 한국에 돌아오라고.
주인공은 나무를 데려가기 위해 검역 절차를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절차는 여의치 않았죠. 결국 주인공은 귀국 대신 나무 순을 택합니다.
현실을 포기하고 자기 셋방에 틀어박혀 나무에 헌신하는 것은, 사실 기존의 망설임을 극복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무에 자기 이름을 따 붙인 점이 스스로 설정한 한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최후에 나무에게 잡아먹히게 될 위기에 처하는데, 이건 ‘행동하지 않는 자는 결국 가만히 선 나무처럼 된다’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지요?
나무줄기에 감싸인 채로 입에 떨어진 과육의 맛이 지독하게 끔찍했다는 묘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미혹을 기대한 주인공과 독자의 기대를 배신하니까요. 행동하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는 부정적 결말이라는 점에서 글의 교훈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원영에게 구해지지 않고 그대로 나무에 동화되는 결말도, 초장의 나른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몽환적인 마무리가 되어 좋았겠다 싶네요. 이건 제가 심미주의자라 현실 복귀 엔딩보다 어디 늪에 빠져죽는 엔딩을 더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개인 취향이니 감안해주시길.
이 소설은 단편이니까 주인공과 나무 이야기가 중심이었지만, 원영과의 관계도를 보강하여 나무는 노골적인 비유로 기능하고 주로 두 사람의 연애사로 인간관계를 고찰하는.. 그런 깊이감 있는 장편으로 풀어내는 방식도 한번 생각해봄직 하였습니다.
이래저래 영감이 되는 글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