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의 스포일러 부분은 소설의 최종 부분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을 먼저 보시고 읽는 것을 권합니다.
※ 본 리뷰에서 다룬 본작에 대한 해석은 리뷰어의 주관적 해석이고, 작가님의 공식 해석은 아닙니다
제가 느낀, 중단편소설에도 크게 비중을 실어 주는 브릿G의 시스템 덕분에 좋은 점 중 하나는, 작가님들이 단편 작품 활동도 많이 하시고, 그런 작가님들의 단편 작품들을 읽으면서 작가님들 고유의 개성과 작풍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본작의 작가님이 집필한 작품들은 다 읽고 나면 느낌표가 뜨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는데, 본작만큼은 물음표를 던져주었습니다. 그 물음표가 작가님이 본작에 대해 리뷰 공모를 하게 된 계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여러 번 뜯어보고 물음표가 제 나름대로 느낌표가 된 지금, 때 지난 리뷰를 써 봅니다.
1. 유명한 일화의 세련된 뒤집기
스님 둘이 함께 길을 가는데 시냇물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던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한 스님은 대번에 그 여인에게 강을 건네주겠다면서 여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습니다. 여인이 떠나간 뒤에 한참 뒤 그 스님에게 다른 스님이 “출가자가 어찌 젊은 여자를 등에 업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여자를 등에 업고 있느냐?”
본작을 계속 읽다보면, 경허 스님의 일화라고도 하고, 일본의 승려 하라 타잔의 일화라고도 알려진 일화가 계속 해서 맴돌았습니다. 집착과 해탈에 대한 비유로 유명한 위 일화와 대비해보면, 본작에서 이름이 없어 아가라 불리우는 여인은 무염을 끊임없는 시험에 들게하는 존재입니다. 무염은 여인을 의식하게 되면서 조롱에 가까운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예 여인을 마라 파피야스의 딸 라가라 칭하며 욕망의 시험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씁니다. 무염은 과연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위의 일화가 보여준 해탈의 모범을 뒤집어,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한 수행자의 비극을 그려냅니다. 여인을 업고도 마음에 두지 않은 스님이 있었지만, 무염은 여인을 들이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의식하며 흔들립니다. 여인은 곧 마라의 딸이 되어 무염을 시험하고, 무염은 연민과 집착,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번민합니다. 끝내 그는 목탁으로 여인의 머리를 내리치고, 항마촉지인을 취하며 “지신이여, 나를 증명해주소서”라 외쳤는데, 마라 앞에서 마지막으로 번뇌를 끊고자 한 절박한 몸짓이자, 동시에 수행자로서의 자기 증명의 순간으로 남습니다. 작품은 명확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염은 과연 마라의 시험을 넘어섰는가, 아니면 끝내 여인을 등에 업은 채로 머물렀는지. 아니면 사실 무염이 이미 여인을 그렇게 인식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해탈은 물건너 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본작을 처음 읽었을 때는, 무염은 자신의 암자에서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여인의 청을 처음에는 아녀자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내가 저 여인을 여자로서 본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그것도 안 될 말’이라며 여인을 암자로 들이는 이유에 대한 내적 심리 묘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부분이 인상깊었고, 아녀자를 들일 수 없다는 계율적 이유와 성적 금기인 동시에, 무염의 내면에 이미 성적 의식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여인을 유혹·색정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무염은 초반부터 마라의 시험에 흔들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어느 순간 작가님이 개고를 하신 것이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원래 그랬는데 제가 마라 파피야스의 시험에 걸려버려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지, ‘저 여인은 참 남에게 많이 빌어 사는 삶이구나’라는 심리 묘사와 함께 여인은 무염에게 측은지심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리뷰를 쓰는 지금 이태천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한테 치매가 온 건가 싶어 상당히 당황스럽기는 한데, 만약 제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 작가님이 실제로 개고를 하신 것이라면, 무염을 여색에 흔들린 노승이 아니라 연민으로 시작했지만 번뇌에 무너진 인간으로 그려내려고 한 건 아닐까, 단순히 인간은 욕망에 쉽게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연민조차 번뇌로 변질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하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추측해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욕망은 구분이 어렵다고 하는 걸 생각하면, 꽤 세련된 수정이랄까요.
2. 결말이라는 또 하나의 시험
본작은 마라의 시험에 저항하는 무염의 마지막 모습으로 끝났어도, 작가님 특유의 강렬함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인데, 작가님은 작품 말미에 강력한 반전으로 추가 설정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전을 이루는 사실은 대단히 직설적이면서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서두에도 썼듯 제가 읽은 작가님의 다른 호러 작품들은 닫힌 결말의 구조를 주로 취하고 강렬한 결말을 선사했는데, 본작의 마지막 서술은 닫힌 결말을 보여주면서도 왜? 라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역설적으로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본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바로 결말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서사를 무위로 돌릴 수도 있는 선택지 였는데, 결말에 대한 작가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작품은 마지막에 ‘무염’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태천’이라는 본명을 내세우고 ‘치매 진단’이라는 냉정한 현실의 언어를 배치합니다. 의사와 보호자의 대화를 통해 지금까지 쌓아온 종교적·상징적 긴장을 한순간에 “치매 환자의 환각”으로 환원시켜버리고, 읽는 이가 종교적·초월적 해석에 빠져드는 걸 의도적으로 차단합니다. 지금까지 본 것은 다 환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허탈감을 선사합니다. 인간의 신앙 체험도 결국 현실의 병리학으로 설명되는 것에 불과할까요. 욕망과 함께 무염의 팔에 돋아나는 비늘은 치매 환자의 흔한 시각적 환상이었던 걸까요.
허탈감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싶다가도, 작품의 제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작품에 붙잡아두었습니다.마라 파피야스와 라가에 대한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니, 결말은 단순히 무효화의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중 해석의 여지를 던지는 장치였습니다. 치매에 걸린 이태천 할아버지에 몰입해보면, 세속적이고 의학적인 설명과 별개로, 이태천 할아버지에게 무염으로서의 체험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는 노인은 치매로 고통받을 뿐이지만, 이태천/무염 내면에서는 마라와의 싸움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치매야말로 현대 의학이 이름 붙인 마라일수도 있습니다.
「마라 파피야스」라는 제목은 단순히 노인에게 닥친 시련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도 마라를 제시합니다. “이건 치매 환자의 환각일 뿐이다”라며 안전한 해석으로 도망칠 수도 있고, “마라는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 마음속에 산다”라는 종교적 해석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독자에게 내려진 해석의 갈림길 자체가 독자가 맞닥뜨린 마라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본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한 작가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분석적으로 접근한 리뷰이지만, 작가님이 이 작품에 대해 리뷰 공모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도 고민해보니 그저 독자로서의 다양한 감상을 보고 싶으셨나 싶기도 하여, 본 리뷰의 성격 분류는 ‘감상’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서사나 구조 분석은 집어치우고, 제 연재작들에 대한 실험 정신을 본 리뷰에도 담아봅니다.
작품을 곱씹다가 둘 다 버리지 못하여 나뉘어진 제 감상을 두 가지 버전의 기록으로 남기며 리뷰를 마칩니다.
재밌었어요!
법문 : 무염 스님의 두 얼굴
대중들이여, 수행자의 길은 언제나 마라 파피야스의 시험과 함께합니다.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명 ‘무염(無染)’이라 불렸으나, 팔순의 나이에 환영과 환청을 겪었습니다. 팔뚝에는 비늘이 돋고, 여인은 색정으로 다가왔으며, 마귀의 목소리는 그의 수행을 조롱하였습니다. 노인은 결국 목탁을 들어 여인을 내리쳤습니다. 수행의 도구가 폭력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염, 물들지 않는 자라 불리더라도 번뇌에 물들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자비가 집착으로 바뀌고, 계율이 무너지고, 마음이 흐트러지면 수행자는 쉽게 마라의 덫에 걸립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마지막 순간, 결가부좌하여 항마촉지인을 취하며 외쳤습니다.“지신이여, 나를 증명해주소서.” 그 손끝에서 피가 흐르고, 대지가 진동하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무염은 비록 흔들렸으나, 최후의 순간만큼은 다시 수행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마라 앞에서 스스로의 길을 증명받고자 했습니다. 피는 업의 무게를 상징하고, 땅의 진동은 진실을 증명하는 울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두 얼굴을 가집니다. 하나는 마라에 흔들려 무너진 무염의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에 항마촉지인을 취한 무염의 항거입니다.
대중들이여, 이것이 곧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번뇌에 물들기도 하고, 끝내 다시 일어서기도 합니다. 실패와 항마는 둘이 아니며, 그 모든 과정이 수행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또한 방심하지도 말며,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논문 : 치매 환자의 환각 속 체험에 관한 이중적 증례 보고
<초록>
본 증례는 80세 남성 치매 환자의 임상에서 관찰된 종교적 환각·환청과 신체 체감 이상을 기술한다. 환자는 법명 ‘무염’을 자칭하며, 환각적 여성 인물, 마귀의 환청, 팔뚝의 비늘 환영, 항마촉지인 체험 등을 보고하였다. 임상적으로는 환각에 따른 실패적 행동이지만, 환자의 주관적 세계에서는 종교적 절정 체험으로 해석되었다. 본 사례는 치매 증상의 이중적 해석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례 보고>
환자 배경 :
80세 남성. 불교 신앙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으로 보이며, 스스로 ‘무염’이라 칭함.
주요 증상 :
시각 환각: 팔뚝에 비늘이 돋음.
대인 환각: 40대 여성 인물 출현, 동거 요청.
청각 환각: 수행을 조롱하는 마귀의 목소리 청취.
행동: 목탁으로 여성 환각을 공격했다고 진술. 손끝에서 피가 흐르고, 대지가 진동했다고 보고.
<분석>
(1) 실패의 층위 – 임상적 관점
환각에 현혹되어 여성 환각과 상호작용, 공격 행동으로 이어짐.
환청·환시·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며, 현실 검증 능력의 상실이 뚜렷.
“무염”이라는 자칭 법명과 종교적 서사는, 환자의 신앙적 배경이 병리적 증상에 반영된 사례.
결과적으로, 환자는 마라라는 환각에 휘둘려 실패적 행동을 반복했다고 평가됨.
(2) 절정 체험의 층위 – 주관적 관점
환자는 마지막에 항마촉지인을 취하며, 불교적 전통에서 부처가 마라를 항복시킨 장면을 재현.
피와 지진의 체험은 체감각 환각으로 보이지만, 환자에게는 우주적 증명의 경험으로 인식됨.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환자 개인의 세계관 속에서는 영적 절정으로 자리함.
임상적으로는 병적 증상이나, 문화·종교적 맥락에서는 의미 있는 체험으로 존중될 필요가 있음.
<결론>
「마라 파피야스」사례는 치매 환자의 증상을 단순히 병리적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환자의 주관적·문화적 체험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