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기 전에 니그라토 씨의 소설을 몇 편 읽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하인라인과 비슷한 스탠스와 글쓰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낭만적인 로맨스도 보이는 것도 비슷하다. <여름으로 가는 문>이 아름답게 포장된 냉동인간의 러브 스토리이긴 하지만, 사실 잘 따지고 보면 어린 여자에게 반한 남성이 합법적으로 결혼하기 위해 스스로 냉동인간이 되는 이야기에 불과하고, 시대적인 한계(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7년에 집필되었다)로 여성에 대한 관점도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소설에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아서, 그리고 과도한 묘사나 설정구멍 없이 매우 잘 쓰였기에, 마지막으로 자칫하면 진부할 수도 있는 냉동인간의 클리셰를 새롭게 보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 본다. <여름으로 가는 문> 이야기가 21세기에 나왔다면 과연 읽힐 것인가? 아마 읽히지 않을 것이고,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 21세기 하인라인은 원고의 웹진 게재나 단행본 출판을 위해(혹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이야기를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만약 21세기의 하인라인이 제법 영리하다면, 그는 자신만만한 주인공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고 한 레즈비언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21세기 버젼 <여름으로 가는 문>이 읽히기란 어려울 것이고ー샐린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ー, 21세기 하인라인은 적어도 세 번 이상 출판사에게 퇴짜를 맞으며 소설을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작품으로 돌아오자. 같은 작가의 <법령 오멜라스>를 읽었다. 이 소설은 묘사가 필요 이상으로 직접적이라는 게 흠인데, 만약 미래 세상의 부조리함을 드러내려는 목적이었다면 조금 더 영리하게 쓸 필요가 있다. 단지 그런 세상을 긍정하기만 할 뿐이라면 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을 저술한 작가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소설에 대한 지난 세기의 진부한 클리셰, 예술과 숭고한 감정을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내가 바라는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설정을 모아놓은 설정집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뭔지 잘 모르겠다면, 실제로 이건 어려운 문제인데, 질문의 한 방법으로써 소설 쓰기가 독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는 소설을 외면할 테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질문의 힘이 강하다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질문이 꼭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소설은 세상의 빛을 받을 수 있다.
내 생각에 작가에게 가장 부족한 것도 이 질문이다. 질문으로서 소설은 소설에 대한 단순한 자세나 스탠스가 아니다. 혹은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독자에게 내던지는 무책임함도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중 문학이 결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질문이다. 소설을 쓰기 위한 사소한 기교, 잘 읽히는 전개, 매력적인 이야기는 공부를 통해 습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질문은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성찰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질문을 찾기를 바란다. 설령 그 작업이 매우 지난하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찾아낸 뒤에는 분명히 제값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