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는 건 부모다.
아이는 부모를 택할 수 없으나 부모는 아이를 택할 수 있다.
물론 택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쇼핑하듯 원하는 것만 쏙쏙 장바구니에 담는 그 ‘택함’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글의 제목은 <부모 체험 시뮬레이션>.
제목을 보자마자 클릭할 수 밖에 없었다.
오래 전부터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왔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등록하고 아이의 발달기 특성을 달달 외우라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성장과 아이의 교육에 대해 많이 아는 것만이 능사였다면, 아동과 청소년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집에서 부모 자식 간 갈등을 빚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했어야 맞다.
연애로 고생해본 적 한번 없는 사람 찾기가 어렵듯, 부모자식간 관계로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에게 모든 짐을 씌우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의 입장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나 받아들임 그 이상의 장기적인 교육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부모됨’조차 허락받지 말아야 할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최찬진과 조성아는, <부모 체험 시뮬레이션>을 위해 센터를 방문한, 좋은 조건을 갖춘 예비부부이다.
이미 경제적인 조건과 육아를 감당할만한 능력이 되는 두 부부가 인체 배양기를 통해 태어날 아이를 입양받고자 하는 것을 보니, 한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둘 사이에선 아이를 갖기가 힘들것이라는 것.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듯한 앞 상담자들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았던 아내를 묘사해놓을 것으로 볼 때 아이를 갖기 힘든 상황의 이유는 아마도 아내일 것을 예상해볼 수도 있다.
시뮬레이션을 앞둔 찬진과 성아는 들떠 보인다.
부모 학교 수료도 마쳤다고 하니, 이 <부모 체험 시뮬레이션> 쯤이야 우수하게 끝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시뮬레이션은 상당히 리얼한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지아는 새벽에 곧잘 깨어 우는 아이에서 스스로 말을 하고 의사표현을 할 줄 아는 여섯살짜리 딸이 되더니 사춘기와 부모의 이혼을 동시에 겪은 중학생으로 성장한다.
귀찮은 육아로 심적 고통을 겼던 찬진은 아이를 대신 돌보아줄 수 있을 안드로이드를 집에 들인다.
같이 시간을 보내자며 보채는 아이가 귀찮아 자신의 피로를 풀어줄 친구들과의 만남을 선택한다.
이혼한 아내 대신 자신의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해주는 딸의 사적인 이야기나 자신에 대한 걱정은 안중에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어찌저찌 멀어진 딸의 비극을 눈 앞에 두고서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열변을 토한다.
구구절절한 늘어놓음 없이도 대략의 삶을 몇문단으로 정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삶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간다.
이런 소재의 글이 한번쯤은, 언젠가는 나를 마주치리라 생각했다.
괜찮은 소재를 가진 글은 그럭저럭 무난하게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마지막 문장에 이르자 아주 인상적인 마침표를 찍었다는 인상도 준다.
그러나 아쉬웠던 점을 그 하나로 덮기엔 부족함이 느껴진다.
‘이토록 부모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찬진’을 세게 표현하려다 약간 무리한 게 아닌가 싶다.
찬진의 무성의한, 그리고 다분히 부족한 부성애를 표현하려하는 문단에선 공격성과 다급함이 느껴졌고 후반부에 접어들자 쏠림은 더 심해진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만 같은 문장과 인물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워 빨리감기를 눌러놓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문장 문장의 이어짐에서 매끄럽지 않은 인상을 받았던 것도 약간은 아쉬운 부분.
그럼에도 이야기는 비밀스러운 구석을 남겨 여운남기기에 성공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계, 그리고 그 기계가 제시하는 ‘인간다움’에 대한 의문이라니-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타임패러독스 이야기가 나오긴 했다만) 묘한 이질감을 가슴 속 어딘가에 담아준 채 근질거리게 만든걸 보면 제법 흥미로운 글이었다 판단하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후에 기술된 타임패러독스, 타임리프를 염두에 두고 글을 다시 읽었을 때 그 맛이 달랐단 거다.
간만에 허를 찌르는 이야기를 읽었더니 이렇게 리뷰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