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피엔스님의 공모로 작성된 것임을 밝힌다.>
목차
1.잠이라는 제약
2.제약을 파괴하기
3.사회에 대한 관찰
4.그리고 좀비
5.눈먼 도시의 주민들
6. 마치며
이 글의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생뚱맞으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은 이렇다.
너는 무엇에 눈이 멀었는가
네가 무엇에 눈 멀었는지를 묻는 일은 그 전제로 우리들이 눈먼존재임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글의 시작에서부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도, 나도, 당신도, 우리도 눈먼채 살아가고 있다. 이는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1.잠이라는 제약
인생의 절반은 잠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면의 비중은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잠은 제약이 되지 않는다. 깨어있는 동안 충분히 행복할 때, 깨어있는 동안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을 때 잠은 회복이며 동시에 치유다. 그러나 21세기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그다지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사회는 발전지향적으로 움직이며, 개인은 끊임없는 증명과 쇄신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잠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보충수단으로 변한다. 생각해보라. 흔히 보이지 않는가? 밤새 게임을 하고, 학교에서 잠드는 아이들, 잠을 줄여 운동을 하는 회사원. 이는 우리가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다는 예시다. 작가는 이에 주목한다.
2.제약을 파괴하기
그리고 이렇게 가정한다.
만약 우리가 잠들지 않아도 된다면?
화자의 아버지는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외판원으로, 그의 회사에서는 잠에 들지 않는 약(ALLNIGHT)를 출시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올나잇트라는 약의 이름인데, 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나는 너랑 밤새도록 있고 싶어. 이 게임 밤새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아. 올나잇은 말뿐이었던 관용표현을 실현시킨다. 그렇게 남녀노소 사람들은 이 약을 구입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 차츰 드러난다. 작중 인물들은 이렇게 진술한다. 난 밤새도록 넷플릭스를 볼거야. 또는 난 밤새도록 공부해서 성적을 올릴거야.
의외인 것은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을 향락이나, 놀이에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밤이 사라진 사회. 올나이트 덕분이었다. 기업, 은행, 관공서는 물론 학원도 24시
간을 운영했다. 그런 학원을 아이들이 다니고 부모들은 학원비를 대려고 밤에 집을
나가 일을 했다. 덕분에 언론에서는 올해 고용률과 국민소득이 대폭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당장 공사장을 얼씬거린다고 여진의 소득이 대폭 증가할 리는
없었다. 결국 여진이 매달릴 사람은 아빠였다. 올나이트 영업 실적 덕분에 올 연말 억
대의 성과급을 보장받은 아빠.
늘 자아를 실현하고 놀 시간을 원했지만, 정작 시간이 주어지자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모습, 아이들은 24시간 학원에 다니고, 어른들은 끝없이 회사를 다니는, 묘사는 단순 분량을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에서 기인한다.
생각해보라, 왜 우리들은 잠을 자지 않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까. 잠을 자지 않는 동안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는 모습이 떠오를까. 이는 잠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면 시간에 깨어있는 것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며, 그 시간은 우리가 얻은 잉여의 시간, 의무가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이 일반적인 것이 된다면 어떨까. 아마 판도는 정 반대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깨어있을 수 있는 존재에서, 당연히 깨어있는, 삶의 시간이 48시간이 된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늘어난 일상 동안 삶의 방식은 그 분량만 확대된 상태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을 통해 우리는 작자가 잠을 주제의 전달 수단으로 뿐 아니라, 소재로서의 고증 측면에서도 잊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3.사회에 대한 관찰
소설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우리는 사회에 대한 작자의 지적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화자의 부모에게 동생을 산재로 잃은 희생자가족이라는 설정을 적용함으로서, 자신을 대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작자가 바라보는 소시민의 상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아래 구문을 파헤쳐 보자.
잠 못자게 만드는 이 사회를 탓해야지 참.
사회를 탓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회를 탓하면 어떻게 되는데?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사회는 사람들을 잠못자게 하는 주범이며, 동시에 그 원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살펴보자, 현대 사회는 발전지향적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핵심가치는 경쟁이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경쟁이 잠을 못자게 만드는가? 이는 큰 단위의 경쟁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경쟁은 단순한 달리기 경쟁이 아니며, 그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에 따라 성원 각각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자는 동안 누군가가 노력을 하고 있다면? 내가 자는 동안 상대가 나를 이긴다면?
그렇다. 우리는 끝나지 않는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며, 잠은 패배할지 모르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작자는 이렇듯 우리가 만성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에 우리가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대개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의 경우 독자를 고취시키거나, 희망을 제시한다. 하지만 본 소설은 담담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회를 탓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으며,우리는 그저 사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이를 잠을 주요 소재로 내세운 것과 함께 보면 미묘하게 읽힌다. 이렇게 묻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당신 너무 비관적으로 적은 것은 아닌가? 소설가라면 세상을 고취하고 응원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와 같은 독해는 부적절하다.작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비관이나 절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래 내용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엄마에게 올나이트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여진이 잠이 많은 것이 누굴
닮아서이겠는가? 바로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는 미국 주식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그
놈의 잠 때문에 군침만 흘렸었다. 그랬던 엄마는 이제 올나이트 덕분에 미국 주식은
물론 유럽 주식까지 넘보고 있었다. 그래서 평일만 되면 식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
고 밤새 들여다보곤 했다.여진은 엄마가 벌건 눈으로 아침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러다 눈이 잘못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엄마는 한술 더 떠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밤이 되면 집을 나가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경기장, 공연장, 상습 정체 구간 같
은 곳을 찾아가 뻥튀기를 파는 것이었다.
주식은 단순한 묘사나 디테일한 요소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아가 우리들, 현대인의 생활방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주식은 내가 알지못하는 요인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 타인이 먼저 살지도 모르는 것에 해당한다. 우리는 매 순간 주식을 하는 것과 같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먼저 팔거나 매수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고 만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주식을 하고 있고, 매 순간 그 주식을 살펴야 한다면, 집회와 혁명을 꿈꿀 수 있겠는가? 세상에 맞서겠다고 생각할 여유가 있는가? 대답은 이렇다. 그렇지 않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비관의 실체는 ‘희망의 부재’가 아니라, ‘저항할 여력을 스스로 반납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대한 고발이다. 우리는 잠을 포기하고 얻은 24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삶을 위해 쓴다고 믿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경쟁의 장인 ‘주식 전광판’ 앞에 묶여 있을 뿐이다. 작가는 이 서늘한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아직도 막연히 희망을 외칠 수 있는 것이냐고. 당신은 정말 자유롭냐고.
4.그리고 좀비
이러한 작자의 비판은 올나잇트의 부작용이 드러난 지점에서 절정으로 치닿는다. 물론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올나잇트라는 소재를 사용해 획득한 신선함을, 좀비라는 소재를 사용함으로서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자의 욕망에 눈이 먼 인간들을 좀비로 묘사함으로서 효과적인 풍자를 이룬다. 작자는 화자가 굿즈를 구매하러 간 판매장 앞, 뻥튀기를 판매는 어머니를 배치함으로서 좀비의 상징을 의도한다. 이는 효율적인 방식이다.
“저 좀비 같은 아줌마가 너희 엄마인 거 다른 사람은 모르지?”
화자의 친구가 큉헤진 어머니, 그리고 돈에 집착하는 어머니를 좀비라고 부름으로서, 독자는 좀비가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을 상징한다고 넌지시 전달받으며, 동시에 약에는 무언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좀비의 이미지는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다. 처음 화자의 어머니가 부작용의 확진자로 정해진 이후 작자는 ‘물어뜯음’이라는 관습적인 이미지를 사용한다.
에이햅 매장에서 일어난 집단 광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불과 3일 뒤에 어느 교회에
서 설교 중인 목사를 신도들이 물어뜯었고, 그다음 주에 어느 가수의 콘서트에서 관
중들이 무대로 난입해 가수를 물어뜯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평화롭게 시작한 시위가
살육전으로 변했고, 각종 스포츠 경기는 반칙이 난무하다 서로를 물어뜯는 아비규환
으로 끝났다.
물론 이는 욕망하는 무엇을 물어뜯는 행위로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강한 효과를 지닌다. 덧붙여 작자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두 강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고, 그 욕망을 상대를 파괴하고 내것으로 만드려는 욕망이라고 고발한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와 달리 이는 개별적이었던 서사가 좀비소설의 아류로 오인될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작자는 플리핑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 좀비 서사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그러기에 좀비물의 향기는 너무 강하다. 독자는 연관된 단위, 즉 분위기로 작품을 기억하는데, 좀비의 경우, 전염병, 제약회사, 실험, 부작용 등 이 이야기의 핵심 소재들과 맞닿아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주제를 시각화하는 장치로서는 유효했을지 모르나 장르적 오염이 그보다 컸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본작과 같이 고유한 설정과 특징을 이끌어나가는 작품, 사회적인 진술을 이어나가려는 작품의 경우 장르물의 아류로 여겨지는 것은 치명적이다. 일정 독자의 경우 메세지에 주목하기 보다는 좀비물의 아류나 신선한 변형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5.눈 먼 도시의 주민들
이제 다시 처음의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너는 무엇에 눈이 멀었는가?
이제 어떤가? 조금은 날카롭게 다가오는가?
당신 스스로 자문해보라. 눈을 감은 것은 누구인가? 당신이 스스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험, 승진, 재산…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욕망에 눈이 머는 것, 그것은 마땅히 갖춰야할 덕목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눈을 뜨라고, 당장 눈을 떠서 세상을 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한마디를 기억하라. 눈을 먼 이는 자신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마저 잊게된다는 것을
어떤가? 당신은 정말로 눈을 뜨고 있는가?
6.마치며
세상은 점점 더 발전 지향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긴 시간을 얻기는 커녕 더 긴 경쟁에 묶여가는 것 같다. 그렇게 유감인 세상,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다.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눈 뜨는 방법은 오직 하나, 자신의 눈이 멀었다는 것을 똑똑히 바라보는 것 뿐이라고. 여러분에게는 잠이 휴식의 시간이길 바라겠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과, 사피엔스 작가님께 감사를 보낸다. 눈먼 도시의 주민들이여 그럼 안녕히 주무시기를, (올나이트는 복용하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