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팔도를 떠도는 한 사내가 있다.
흰 도포 자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커다란 삿갓 아래 얼굴을 감추고 대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낯선 마을로 들어서며 이 작품은 시작된다. 왼쪽 눈엔 검은 안대를 두른 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성이 박 씨이기 때문에 ‘외눈 박’이라 소개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나그네가 아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기이한 요괴 이야기를 전달한다.
자칫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내 농은 잘 쳐도 없는 걸 만드는 이야기꾼은 아니오.” 라는
외눈 박의 말에 이 모든 이야기는 그가 직접 보고 겪은 삶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외눈 박’이 들려주는 요괴 이야기들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작품이다.
눈알을 빼먹는 ‘깜북이’, 사람들의 미움과 시기를 먹고 사는 ‘투다니’, 천하를 가지려고 한 요괴 ‘환락거미’ 등
각기 다른 모습의 요괴들이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단순히 요괴를 퇴치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의 에피소드 안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요괴 자체가 아닌 그 요괴들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본다는 데 있다.
어떤 요괴는 악을 드러내지만, 어떤 요괴는 마음속 선함을 지닌 채 사람을 돌봐주기도 한다.
특히 요괴를 향한 ‘외눈 박’의 태도가 신선하다. 요괴를 무조건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고 해치우지 않는다.
선한 마음이 남아 있는 존재에게는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는 따뜻한 시선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외눈 박이 ‘사람에게 맞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죽음을 결심한 이에게는 초롱각시 이야기를 통해 삶의 불씨를 되살려주고,
현실 도피를 꿈꾸는 청년에게는 반잡객 이야기를 통해 삶의 방향을 다시 잡게 만든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지 재미를 위한 게 아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겐 거울이 된다.
아이들에겐 신기한 이야기꾼으로, 어른들에겐 마음을 움직이는 한마디를 건네는 치유자로 남는다.
이야기 속 이야기의 주인공 ‘서리태’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요괴에게 가족을 잃고 복수를 위해 칼을 든 서리태의 서사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결과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리태가 바로 ‘외눈 박’ 자신이라는 사실을 통해
그는 단순히 전설을 전하는 이가 아닌 그 전설을 만든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가 쥔 무기인 ‘윤회도’는 선한 마음이 남은 존재에게 자비를 허락한다. 칼을 들기 전에 그는 스스로 묻는다.
“정말 죽여야 하는가?” 복수로 시작된 여정이, 이해와 자비로 이어지는 이 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깊은 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물은 수행을 쌓아 영물이 되고, 영물은 덕을 쌓아 신수가 되어 승천하지. 그러나 타락하면 요괴가 된다.”
이 문장은 이 작품의 핵심을 말해준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작은 미움이 시기와 분노로 커지고, 그 감정에 휩쓸릴수록 우리는 괴물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고 덕을 쌓아간다면, 누구든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도 함께 전해준다.
‘외눈 박’이 왜 이야기꾼이 되었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려 했는지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나 또한 삶의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교훈이 되고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그가 남긴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