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던 건지, 억지로 누름돌을 얹었던 것인지, 사람이 감정에 무디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감정에 일일이 휩쓸려서야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감정은 해소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쏟아내지 않았던 감정들은 사소한 계기로 다시 치솟아 오릅니다. 언제적의 감정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기조차도, 오랜만에 읽은 무슨 잡지 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건넨 레몬 카라멜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용복 작가님의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그런 감정의 아련한 쇄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적인 미묘한 타임 슬립 요소가 있고, 호러 요소가 있습니다.
꽤 놀랐던 점은 이 작품이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품 내에서 ‘부전시장’이라는 시공간은 지금도 실재합니다.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 근방입니다. 자주 가는 곳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버스를 타고 지난 게 다일까요.
300번지도 실재했던 공간입니다.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야 ‘부전시장을 직접 인용하신 걸 보면 당연히 존재하거나, 그랬던 공간이겠지’하고 어림짐작했습니다만, 저는 이 공간의 존재가 의외였습니다. 첫째로 부전동 자체가 시내기도 하고, 부산의 문화를 다룬 어떤 서적에서도 300번지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오는 기록은 적고, 사진 기록은 더욱 적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부산역 차이나타운 거리 바로 옆에는 ‘텍사스거리’가 조성되어 있는걸요. 이 거리도 홍등가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그에 비해 300번지는 사진 몇 장 남기고 잊힌 것 같아요. 어떤 것은 기록조차 남지 않아 쉽게 잊혀버리고, 어떤 것은 상품이 되어버립니다.
잊힌 것들이 몸부림치는 방법은, 역시 개인의 기억을 더듬는 것 뿐입니다. 개인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감각 뿐이구요. 오감.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 그리고 맛과 향.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떤 역사에 대해 오감으로 몸부림치며 ‘이걸 나만 알았던 거야?’하고 소리지르는 짧은 엽편입니다.
조금 더 자료 조사가 많이 되어서, 분량이 길어 어떤 ‘자기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면을 얻었더라면, 작품은 방향성이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지, 아니면 작가적 에고에 매몰된 채 무용한 주장을 내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의 <레몬 카라멜 타임 슬립>은 이미 엽편으로서 충분한 것 같아요.